경동시장 1/24/2015

by admin posted Nov 2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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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_찾아가는_경동시장_07.jpg

 

나는 청소년기부터 대학시절을 “제기동”에서 살았다. 가까이는 청량리 역이 위치해 있었고 조금 더 가면 홍릉과 세종대왕 기념관, 그리고 당시 KIST가 자리한 사통팔달의 동리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진진한 곳은 ‘시장통’이었다. 우리 집은 청량리 시장 끝 쪽이었고, 집에서 나와 15분 정도만 걸으면 경동시장이 위치하고 있었다. 경동시장의 명물은 한약 재료상이 노상과 더불어 장사진을 이루는 광경이었다. 시장 통에 들어서면 한약냄새가 코로 스며들어 묘한 기분을 유발했다. 무엇보다 새벽장이 열리며 온갖 채소, 과일, 어물, 육류 등이 다양하게 팔려나감과 동시에 여느 시장보다 가격이 저렴하여 서민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었다.

경동시장은 6.25 전쟁 이후 서울 사람들의 생활이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경기도 북부 일원과 강원도 일대의 농민들이 직접 가꾼 농산물과 채소, 임산물들이 옛날 성동역과 청량리역을 통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형성되었다. 지리적 한계로 피난민들의 안식처가 되어주지는 못했지만 서울 동북쪽에 위치한 경동시장의 사회적 의미는 아주 컸다. 한국의 향취는 시장에서 현격히 드러난다. 시장은 실로 시간이 종으로 만나고 공간이 횡으로 만나는 생생한 만남의 광장이다. 그 곳은 단순히 상품 매매가 이뤄지는 곳을 넘어 우리의 공동체 문화가 교환되고 확산되는 문화계승의 장인 것이다.

경동시장은 팔방이 뚤려 있는 지형이었다. 청량리 역에서 건너편으로 걷다보면 청량리 시장을 거쳐 경동시장 청과물 시장통을 만난다. 여름이면 수박장사들이 북새통을 떨었다. 마장동 시외 버스터미널에서 곧장 걸어 들어올 수도 있었다. 한약 재료상과 어물전을 만나는 통로였다. 내가 살던 제기동에서 걸어 들어가면 조금은 한가로이 시장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시장에 갈 때면 어느 늙스구리한 노상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주로 농산물을 길거리에 놓고 파셨다. 직접 농사를 지으셨는지? 아니면 어디서 떼다 파시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지나 갈 때마다 “십 리 밖에서 뜯은 취나물이오. 더덕과 백도라지 사세요!”하며 나즈막히 외쳐 대셨다.

경동시장에 또 하나의 명물은 “경동극장”이었다. 두 편의 영화가 동시 상영되는 영화관이었다. 아주 튼튼하고 널따란 극장 계단을 오르면 가슴이 뛰었다. 굳이 따지자면 삼류극장이었지만 표 하나를 사면 기나긴 시간 영화에 심취할 수 있어 좋았다. 재미있는 영화는 또다시 본다고 해도 전혀 방해를 받지 않았다. 덕분에 영화를 많이도 보았다. 무슨 영화를 보았는지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볼거리가 거의 없던 70년대에 다양한 영화를 보며 꿈을 꾸었다.

그렇게 20대에 접어들며 22살 신학대학에 입학을 했다. 가난한 신학생 시절. 어머니는 갑자기 경동시장에 가셔서 도라지를 사오셨다. 흙이 잔뜩 묻은 도라지는 보기에도 정이 가질 않았다. 도라지를 큰 다라(함지박)에 쏟아 붓고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부어놓으셨다. 물에 젖은 도라지를 꺼내 투박한 껍질을 벗겨내고 여동생을 불러 앉혀 놓고 도루코 면도날을 끼운 희한한 모양의 칼로 도라지를 갈래갈래 찢어놓는 작업을 하셨다.

다음날 꼭두새벽, 어머니는 그 무거운 도라지를 머리에 이고는 경동시장으로 나가 도라지를 팔아오셨다. 궁색한 가정형편을 지켜만 보고만 있을 수 없으셨던 억척스런 어머니의 생존방편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도라지 까기’는 언제부터인가 우리가정에 일과가 되어갔다. 누이는 이미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퇴근을 하면 온 식구들이 둘러앉아 도라지를 까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익숙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나는 남자의 자존심이랄까? 체질에 안 맞아서일까? 절대 도루코 칼을 손에 잡지 않았다. 어머니도 그런 나에게 한번도 일을 시키시지 않으셨다. 한국에 갈라치면 우연히 경동시장을 지나칠 때가 있다. 하지만 옛날 경동시장의 정취를 찾기에는 세월의 흐름이 무섭다. 10대의 청소년이 지나치며 기웃거리던 재래시장의 푸근한 풍경은 말끔히 단장을 하고 세련된 시장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내 어린 가슴에 사람 사는 냄새를 심어준 경동시장이 고맙기 그지없다. 그 시절, 상인들의 부산스런 외침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