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를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 1/13/2011

by admin posted Nov 2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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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비단 당사자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장애인 형을 둔 어떤 분이 어린 시절 “형 때문에 화장실에 들어가 운적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할 때 필자의 가슴은 아려왔다. 사람들은 필자를 만나기만하면 물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어쩌다가 다리의 장애를 갖게 되었느냐?”고. 그때마다 필자는 대답했다. “2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서 장애를 갖게 되었습니다.” 소아마비. 참 많은 가정에 불어 닥쳐 멀쩡한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놓고, 가정을 먹구름으로 가득 차게 만든 증오스러운 이름. 밝고 아름답게 살아야 할 한 인생이 소아마비에 걸려 그늘에서 피어나지 못하고 눈물지으며 생을 이어가야만 한다면 이처럼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나마 소아마비는 유전되는 병이 아님에 대해 감사했다.

아버지는 경찰관이셨다.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지평) 파출소에 근무하실 때에 동료 경찰관이 세분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중에 고 순경님은 아버지와 막역하게 지내는 동료이자 아우였다. 남매를 두었는데 아들은 나와 동갑내기였고, 그 밑에 딸이 있었다. 그런데 그 딸이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몸을 많이 뒤틀고 말이 어눌한 것을 보아서 지금 생각해 보니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얼굴도 참 예쁘고 착한 아이였는데 입에는 항상 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 아이가 유독 나를 잘 따랐다. 자기 오빠보다 나를 더 좋아해 나만 보면 항상 웃고 ‘기우뚱’거리며 다가왔다. 나는 그것이 그렇게 싫었다. 어느 날인가? 엄마에게 “그 아이 좀 우리 집에 오지 말라고 하라”고 까지 했다. 까마득한 옛날이지만 나이가 들어가고 장애인사역을 하면서 그 사실이 너무 부끄럽고 그 아이에게 너무 미안하다. 지금 어느 하늘아래 살고 있을 그 아이(지금은 중년)에게 사죄하고 싶다.

아버지는 가끔 고 순경님 가족을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하는 것을 좋아하셨다. 그날도 안방에서는 아버지와 고 순경님, 우리 아들들이 자리를 잡았고 어머니와 여자들은 건넌방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감히 여자들이 남자 손님들과 얼굴을 맞대고 식사를 하는 것은 상상이 안가는 때였다. 한창 소주잔을 주고 받으시던 고 순경님이 갑자기 몸을 떨기 시작하였다. 아버지가 고 순경님의 손목을 잡으며 진정을 시키셨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나중에 알았지만 고 순경님은 “간질병”을 앓고 계셨다. 딸의 장애를 가슴아파하다가 얻은 병이라고 엄마는 설명을 해 주셨다. 그러고 보니 나의 아버지도 유독 술을 많이 드셨다. 경찰관 생활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소아마비 장애를 가지고 다리를 절며 다니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를 애비가 된 지금 절실히 느끼게 된다.

필라델피아 밀알선교단을 섬긴지도 어느새 8년차에 접어든다. 장애를 가진 아동들과 사랑을 나눈지가 햇수로 9년째가 되는 것이다. 밀알선교단에 소속되어 있는 장애 아동들이 모두 30명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동”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장성해 버린 아이들의 모습을 본다. 내가 처음 단장으로 올 때 만해도 어리디 어리던 아이들이 9살을 더 먹었으니 진짜 아동은 반 밖에 안 되는 셈이다. 초등학교(Elementary School)에서 고등학교(High School)까지는 특수 학급(Special Class)이 있어서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세심하게 돌보아 준다. 장애가 심하면 한분만이 아닌 더 많은 선생님들이 극진하게 보살펴 준다.

문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이다. 보통일 경우에는 가족들과 함께 생활을 하지만 장애가 심하면 국가에서 운영하는 <복지홈>에 들어가게 된다. 그 사실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 20년을 함께 살아온 사랑하는 자녀를 복지 홈에 데려다 놓고 나오며 부모님들은 피눈물을 흘린다. 가끔 만나는 기회는 주어지지만 자식과 생이별을 하고 살아야 하는 부모님의 심정을 누가 이해하랴! 한국 사람이 한국음식을 먹지 못하는 불편은 그렇다치더라도 어린 나이에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산다는 것이 너무나 답답하고 안타깝다. 아직은 요원하지만 밀알선교단이 추구하는 것은 어서 속히 <한국형 복지홈>을 마련하고 아동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의 삶을 책임져 주는 일이다. 양식이 아닌 한식을 먹게 하고 눈을 뜨면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들려주어 가슴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게 하는 것이 우리의 꿈이다.

장애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날마다 장벽을 만난다는 의미이다. 밀알선교단에서 장애인들을 만나며 깨닫는 것은 내가 가진 장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장애인들의 꿈은 운전이다. 미혼 장애인들이 배우자를 이야기 할 때에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이 <1순위>이다. 그만큼 장애인에게 운전은 꿈도 꿀 수 없는 불가능의 역영이다. 5년 전, 필자가 중매를 해서 가정을 꾸미고 산호세에서 살고 있는 김 형제는 장애가 있었지만 운전을 할 수 있었기에 결혼이 가능했다. 신부는 휠체어 장애인이다. 서로가 부족한 면을 채워주며 섬기는 교회에서 귀감이 될 정도로 장애인 부부는 행복하게 살고 있다.

매년 여름 열리는 사랑의 Camp에서 미혼 장애인 남녀들이 모여 “싱글들의 만남”을 가진다. 거의 대부분의 장애인들이 운전을 하는 배우자를 간절히 원하는 것을 본다. 하지만 그 문제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기에 커플이 탄생하지 못한 채 캠프가 막을 내리며 햇수만 더해가고 있다. 미혼 장애인들과 가족들은 단장인 나에게 “결혼”이라는 보이지 않는 숙제를 내어주고 기대에 찬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다. 나이가 들어가는 장애인들이 그렇게 원하는 결혼을 성사시켜 주지 못하는 현실이 나를 힘들게 한다.

장애인들도 비장애인과 똑 같은 인격을 가지고 있다. 자칫 불가능해 보이는 소망을 그들은 날마다 꿈꾸며 산다. 그들도 남들처럼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자신의 꿈을 펼쳐야 할 충분한 권리가 있다. 그들도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 애틋한 사랑을 나눌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것을 위해 가족이 필요하다. 그 장애를 함께 끌어안고 가야할 가장 측근의 사람들이 가족이다. 바라보면 안타깝고 눈물이 나지만 그 장애를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해야 하는 분들이 가족이다. 지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함께 안아주고 부축을 하다보면 새로운 소망의 해는 떠오르게 되어있다. 밀알사역이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아무 곳에서도 알아주지 않는 장애인들을 밀알에서는 귀하게 여긴다. 어디에서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밀알에 오면 다하게 해 준다. 때로는 앞뒤가 안맞는 이야기에도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끝까지 들어준다. 그렇게 장애인들의 친구가 되어줄 분들을 기다리며 새해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