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에 서면

by 관리자 posted Dec 2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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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덕.jpg

 

 

불현듯 서러움이 밀려왔다. 뜻 모를 감정은 세월의 흐름에 역행할 수 없는 인생의 한계를 실감해서일까? 2015년이 우리 곁을 떠나려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그 신선한 이름과 반갑게 악수를 나눈 지가 그리 길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참 바쁘게도 살아왔다. 밀알사역을 감당하랴, 매주 방송하랴, 칼럼 쓰랴, 여러 교회를 다니며 설교하랴! 필라는 물론이고,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애틀. 캐나다 동 · 서부를 거쳐 한국까지. 교회강단에서 말씀을 전하고, 사석에서 대화를 나누고 그러다가 틈새가 보이면 장애인 선교의 필연성에 열을 올리면서 말이다. 누가 ‘그렇게 살라’고 한 적도 없는데 달리다보니 한해의 끝자락이 보인다.

 

 나는 한시도 가만히 못 있는 성품이다. 그렇다고 누구처럼 일을 즐기는 스타일도 아니고, 부지런하지도 못하다. 무언가 일을 하지 않으면 삶이 무료해 견디지를 못한다. 아마 그것은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성품인 것 같다. 자주 얘기하는 것이지만 나는 초등학교를 무려 5군데나 옮겨 다녔다. 경기도 “지제(지평)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양평, 강상, 서종,” 그리고 다시 “양평초등학교”에서 졸업장을 받았다. 그 와중에 가장 길게 다닌 곳은 “서종초등학교”(양수리 근처)이다. 그래서인지 어쩌다 한국에 가면 찾아가게 되는 곳이 그곳이다.

 

 학교는 북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자그마한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건너편은 “마석”이다. 학교 옆쪽으로 나루터가 있어 누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지를 확연히 알 수 있었고 건너편에서 <금강운수>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부러워했다. 갈대숲이 강물과 조화를 이루며 햇살을 받는 각도에 따라 변신하는 광경은 어려서부터 ‘아름다움’을 동경하게 만들었다. 그 언덕은 글을 쓰는 내 가슴과 손끝에 지금도 머무르고 있다.

 

 그 언덕에서 꿈을 꾸었다. “나는 반드시 서울에서 살리라!” 그 꿈은 양평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이루어졌다. 나처럼 서울을 동경하고 서울에 살고 싶어 했던 사람이 있었을까? 온 가족이 서울로 떠나던 날. 친구들과 그 애는 기찻길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 언덕은 누이와 자취를 하던 집 뒤편에 있었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 뭔가 채워지지 않는 답답함을 느낄 때에 나는 그 언덕에 올랐다. 소리도 질렀고 노래도 불렀다. 가끔 지나가는 기차차량의 수를 헤아리기도 하였다. 어느 순간 다가온 그 애와 나는 그 언덕에서 만나 풋사랑을 했다.

 

 서울에 살며 내가 자주 찾아갔던 언덕은 동작구 “흑석동”이었다. 한강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에서 친숙했던 옛 동산을 그리워하며 사춘기의 열정을 추수렸다. 결혼을 하고서 내가 만난 언덕은 미사리 강가였다. 아내와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가 언덕에 바쳐놓고 말없이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신혼의 단꿈을 꾸었다. 첫 아이가 자라기를 기다리다가 자전거에 태우고 드라마처럼 달리던 곳도 미사리 강가였다. 하지만 개발바람을 타고 그 언덕은 어느 순간 황량한 고속화 도로로 변신하고 말았다. 아쉬웠다.

 

 이제 한해를 보내는 언덕에 서있다. 기찻길이 내려다보이는 낭만의 언덕이 아니다. 한강이 유유히 흐르는 풍치 좋은 언덕이 아니다. 아내와 자전거로 내달리며 바라보던 마냥 행복하던 신혼의 언덕이 아니다. 지금 내가 서있는 언덕은 세대를 갈아치우는 가파른 언덕이다. 인생을 책임질 뿐만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에게 훈훈한 인생담을 들려주어야 하는 언덕이다. 그래서 이 언덕이 너무 높게만 보인다. 어깨가 짓눌려 오는듯한 중압감을 느낀다.

 

 2015년의 언덕을 넘어서면 또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약간은 두렵지만 어깨를 펴고 이 언덕을 넘어 가리라! 삶은 풀어야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할 신비가 아닌가? 지금 내 삶의 언덕은 어디인가?

 

       한 해 동안 칼럼을 읽어주신 분들에게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