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경관을 창문이 좌우한다. 창문의 모양과 방향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장면은 시야로 흡수되고 느낌을 풍성히 움직인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통유리가 있는 집에 살고 싶었다. 창을 통해 시원하게 펼쳐진 정원을 바라보는 것이 로망이었다. 기대했던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 살고 있는 집은 그런대로 전망이 좋은 편이다. 뒷뜰 쪽으로 난 커다란 창은 사계절의 변화를 보여주며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어린아이들은 창문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편다. 저 산 너머에는 새로운 세계가 열릴 줄 안다. 떠오른 무지개를 보며 비단길을 갈 것 같은 꿈에 부푼다. 무한대에 상상을 하는 것이다.
창호지에 익숙했던 시대에 창문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가장 처음 만난 창문은 교실 창이었다. 아침 일찍 등교하여 창문에 ‘호호’ 입김을 불어넣고 친구랑 그림과 글씨를 쓰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겨울이 되어 날이 추워지면 성에가 끼어 도구를 사용해야만 하였다. 수업 중에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얼굴을 찡그리게 했고 창에 비추인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창문에 어려오는 그림이 나를 들뜨게 하였다. 봄에는 아지랑이와 꽃들, 여름에는 소나기와 구름의 향연, 가을이면 춤추듯 나풀대며 날아 떨어지는 낙엽. 겨울이면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눈이 어린 마음에 판타지를 안겼다.
창문을 통해 새로운 세계와 사람들을 만났고 현재와 과거를 보았다. 시간의 문과 같은 창문은 사람들을 다양한 풍경으로 이끌어간다. 색다른 상황을 만나게 하고 변해가는 창밖에 색깔을 보며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편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소리에 마음은 종잡을 수 없는 곳으로 달려 나아간다. 창문에 가만히 기대어 본 적이 있는가? 지금 내가 서 있는 공간과 창을 사이에 두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 빛의 움직임을 가만히 음미해 본 적이 있는가? 창문은 우리를 자신에게서 해방시켜 주고 타인을 향해 나아가게도 한다.
가진 것이 많이 있음에도 가슴 한구석이 채워지지 않는 어떤 부자가 지혜자를 찾아와 상담을 했다. 지혜자는 그 부자를 창문 앞으로 인도한다. “무엇이 보이십니까” “사람들이 보이네요. 모두가 활기 넘쳐 보이는군요. 정말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이번에는 부자를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다. 같은 질문을 했다. “나의 모습이 보입니다. 우울하고 이기심 많은 얼굴이네요.” 이내 지혜자가 입을 연다. “창문이나 거울이나 똑같은 유리로 만들어졌지요. 유리를 통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아름다운 세상도 볼 수 있지요. 유리는 시선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울은 은색으로 유리를 막고 있기에 자신밖에 볼 수 없다오. 결코 행복할 수 없지요.”
그 말처럼 자신만 보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성곽에 갇혀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날마다 거울을 본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나면 필연코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매만지고 옷매무새를 살핀다.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관심을 가지지만 거울 앞을 떠나면 금방 잊어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거울을 치장을 위한 도구라고 할 수만은 없다. 거울을 영혼을 들여다보는 훌륭한 도구로 활용해야 한다. 거울에 비추이는 내 모습을 보며 내면이 드러남을 감지해야 한다. 그래서 도박장에는 거울이 없는 것일까?
눈을 통해 상대방을 보듯이 거울을 통해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거울에 비친 나를 향해 물어야 한다. “너는 도대체 누구니?” 그러면 거울 속에 내가 대답을 할 것이다. 창문과 거울. 이것이 나를 바라보는 두 가지 방식이다. 이 둘은 서로 상반되고 배척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두 가지 가능성이다. 창문과 거울은 일상적인 것이다. 사소하게 취급되고 쉽게 잊어버리는 일을 창문과 거울은 되찾아 온다. 즉, 나를 알게 해주고 남을 알게 해준다. 창문과 거울을 통해 삶에 대한 이중적 시각으로 자신의 삶을 모색하게 할 뿐아니라 인류의 삶을 새롭게 인도하게 되는 것이다. 날마다 나를 찾아가는 작업을 창문과 거울을 통해 거듭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