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라떼를 좋아한다. 블랙은 매번 도전을 해 보지만 취향이 아니고 아직은 촌스러워서 달달한 커피가 좋다.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갈아서 만드는 라떼는 부드럽고 단맛이 혀 끝에 닿으며 기분을 up 시켜 주어 좋다. 지인들은 첨가물 없이 커피를 즐기며 한마디 한다. “커피는 블랙이지, 아직도 라떼를 드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퍼져나가더니 언젠가부터 유행하는 말이 있다. “라떼는 말이야~”(Latte is horse) 이 말을 알아듣는 당신은 신세대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라떼는 커피 아니야?”하는 분은 구세대이다. 일종의 언어유희로 들리는 말을 살짝 틀어서 기성세대들이 많이 쓰는 “나때는 말이야~”를 희화화한 말이다.
기왕 말을 꺼낸 김에 본격적으로 “라떼는 말이야~”를 펼쳐보고자 한다. 나는 베이비부머 세대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교실은 그야말로 콩나물시루였다. 중 ·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합격자 발표는 학교 벽보에 한문으로 표시된 명단을 좌로 붙여나갔다. 오돌오돌 떨다가 내 수험번호를 발견하고 껑충껑충 뛰며 엄마를 끌어안았다. 그때는 보통 한 학급에 60명은 기본이었다. 선생님들은 다 엄했다. 수틀리면 출석부로 때리고 주저 없이 폭력을 가했고 단체기합을 주었다. 누구 하나 그 위엄에 대항할 아이는 없었다. 고등학교 때 소풍은 주로 능(陵)으로 갔다. 서오능, 헌인능, 동구능 등. 모이면 잠시 인원 점검하고 점심을 먹은 후 반별로 장기자랑을 하는 정도였다. 공식소풍이 파하면 옆에 소풍 온 학교 아이들과 어울리며 춤을 추었다. 트위스트부터 고고까지 몸을 흔들며 열정을 발산했다. 나팔바지를 만들어 입고 코스모스 백화점 꼭대기에 있는 로울러 스케이트장에 드나드는 것도 크나큰 낙이었다.
만남은 주로 분식센터에서 이루어졌다. 그때는 뮤직박스가 있어 DJ가 음악을 틀어주며 분위기를 돋우웠다. 군부시대여서인지 영화관에 가면 반드시 애국가가 연주되었고 관객들은 다 일어나 경의를 표해야 했다. 본영화가 시작되기 전 <대한뉴스>가 상영되었다. 더 가관은 오후 5시 국기하양식이 열리는데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가던 길을 멈추고 엄숙한 마음으로 태극기를 향하여 멈춰 있어야 했다. 고교를 졸업하며 자유가 주어지는 듯 하였다. 하지만 장발단속을 피해 도망다녀야 했고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들고 가던 기타까지 빼앗아갔다. 통금시간이 있어 일찌감치 귀가하지 않으면 파출소 신세를 져야 했고 공권력의 위엄은 골리앗급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할것은 다했으니 역시 청춘은 청춘이다.
22살에 소명을 받고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내 생애 즐거움은 그날로 끝이 났다. 마치 고래새끼가 어항에 갇힌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나의 거룩한 멍에는 체질화되어갔다. 그때는 전도사 면접을 하고 나서도 감히 사례비에 대해 물어보질 못했다. 부임하여 한달이 지나 누런봉투를 받아보고서야 액수를 알 수 있었다. 근무시간이 따로 없었다. 담임 목사님이 호출하면 어느때든지 달려 나가야 했다. 36살에 담임목회가 시작되었다. 전도사 채용 공지를 내려고 학교 교무과에 문의를 했더니 사례비와 근무시간을 묻는다. 깜짝 놀랐다. 필라도 마찬가지이다. 자세한 사항을 알려줘야 지원을 해온다.
한국의 시류(時流)는 88올림픽이 분수령인 것 같다. 돌아보면 80년대 중반까지 풋풋하고 정겹던 정취는 사라지고 산업화, 고성장 시대로 치달은 것을 본다. 80년 컬러TV 방송 시작, 82년 통금해제와 프로야구가 개막하며 문화콘텐츠를 바꿔놓았다. 트로트와 포크송, 발라드는 댄스뮤직과 그룹에 밀려나며 문화혁명이 일어난다. 강남이 개발되고 아파트가 치솟고 일산, 분당이 개발되며 속도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상은 달라졌다. 교회도 강남으로 몰려들었고 대형교회는 그렇게 태생하며 위용을 떨쳐갔다. 세태는 급물살을 타며 변해갔다.
나이가 들어가며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이든 자꾸 설명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다 알아듣는데 말이 장황해 진다. 그것을 아는 나는 라떼가 아니다. 억지일까?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을 열어라” 명언중에 명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