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린 시절 남한강 줄기에서 자랐다. 강은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과 느낌을 달리한다. 언덕 위에서 볼 때는 마냥 푸르고 잔잔해 보이지만 모래사장에 내려서면 잔잔히 출렁이는 물결이 건너편을 저만치 밀어낸다. 물가에서 보면 만만해 보이지만 일단 몸을 담그고 헤엄을 치기 시작하면 강폭은 넓어져만 간다. 아침 햇살에 반사되는 강물은 마치 물고기들의 향연처럼 보이고 한낮에 강물은 청춘처럼 푸르르다. 오후가 되면 짙은 감청색으로 변해가다가 노을이 지면 불꽃처럼 붉게 물들어 온다. 예쁘고 매끄러운 돌을 골라 비스듬이 던지면 지나가며 예쁜 포물선을 마냥 그려낸다.
처음에는 자그마한 샘물로 시작되었으리라. 샘물이 모여 내를 이루고 강물이 되어 묵직한 침묵 속에 바다를 향해 흘러간다. 강가에 앉아 노래를 흥얼거리고 이름모를 풀잎을 낙아채 입에 문 채 자갈 위에 앉으면 바람 소리를 타고 들려오는 청아한 새들의 노래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때로는 두팔을 펴고 누운채 하늘을 본다. 저만치 떠가는 구름, 바쁘게 날아가는 비행기, 눈부시게 푸르른 하늘의 넉넉함이 어린 내 가슴에 동화처럼 스며들었다. 끊임없이 흘러들어오고 흘러가는 강물처럼 세월도 쉼 없이 흘러 익숙해진 2020년을 저만치 흘려보내려 하고 있다.
불혹의 나이가 훨씬 넘어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그렇다. 언제까지 청춘으로 살 줄 알았다. 서른 살, 나는 아내와 결혼을 했다. 이듬해 태어난 아가. 나를 닮은 새생명과 함께 오로지 목회에 전념했다. 신학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실로 자유분방하게 살았던 내게 서른은 어른이 되는 길목이었다. 나는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이 제일 부럽다. 하지만 세상을 마음껏 즐겼던 10~20대 초반의 삶이 결코 후회스럽지는 않다. 부끄럽기는 하지만 말이다.
세월이 더디흐른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직장도, 갈 곳도 없어 오로지 기타와 라디오를 친구삼아 지내던 20대 초반, 세월은 안가는 듯 속도가 나질 않았다. 더벅머리를 하고 낮에는 다방에서 턴테이블을 돌리고,(DJ) 밤에는 언더그라운드에서 노래를 부르며 술과 담배에 찌들어 살던 20대 초반. 내 시계는 멈춰있었다. 도대체 내가 왜 살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앞이 보이질 않았다. 복음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나를 무척이나 아껴주시던 멘토목사님의 강력한 권고로 신학을 시작하면서 앞만 보고 달리며 세월의 속도가 붙었다.
목사가 된지 어느새 35년. 일반목회와 장애인목회를 하다보니 옛어른들이 말하듯 나이만큼 세월이 총알같이 달려가고 있다. 2020년. 기대가 컸다. 숫자가 그랬고 내게 주어진 책무의 무게가 가슴을 설레게 했다. 적어도 3월초까지는 그 기대대로 흘러가는 듯 하였다. 하지만 불어닥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그 모든 꿈들을 처참하게 짓밟아버렸다. 아무도 만날 수 없고, 아무 곳에도, 아무 음식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희한한 세상이 되었다. 한동안 세월이 정지한듯한 적막감이 내 뇌를 하얗게 만들었다. 하지만 세월은 쉬지 않고 있었다. 봄인가 했더니, 여름, 가을이 왔나 했더니 눈발이 쏟아지고 2020년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세월은 사람들의 느낌과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흐르고 있다. 바람처럼 들어와 바람따라 나간다. 세월따라 너도가고 나도 간다. 한세대가 가고 한세대가 온다. 학문은 배우고 익히면 되지만 연륜은 반드시 밥그릇을 비워내야 한다. 나이는 거저 먹은 것이 아니다. 손이 커도 베풀 줄 모른다면 미덕의 수치요. 발이 넓어도 머무를 곳이 없다면 부덕의 소치이다. 세월에 걸맞는 멋진 생각, 인격의 사람이 되자.
한해동안 매주 글을 읽어준 애독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아듀,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