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듣도 보도 못한 역병이 창궐하며 지난해는 암흑으로 물들여졌었다. 사람들은 물론이요, 어느 장소, 물건을 가까이 할 수 없는 희한한 세월을 보냈다. 문제는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언제 끝나게 될지 모를 절박한 상황이 새해라는 희망의 이름을 희석시키고 있다. 내 칼럼을 읽는 분들은 가끔 의아함을 느낄지 모른다. 내용 중에 구체적인 신앙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목사가 왜 신앙적 언어를 담지 않을까? 성경 중에 에스더서를 보면 “하나님, 믿음”이란 단어가 전혀 없다. 하지만 성경 중에 가장 신앙적인 향취가 묻어나는 책이 에스더이다.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직설적인 표현이 없어도 글을 읽다 보면 하나님의 숨결이 은연중에 느껴지는 칼럼 말이다.
이스라엘과 한국은 닮은 점이 참 많다. 국화가 무화과/무궁화. 모리아(산)/ 백두산. “애비, 애미, 애기”의 히브리어와 발음뿐 아니라 뜻까지 같다. 출애굽 시에 어린 양을 잡아 문설주에 피를 발라 재앙을 면한다. 우리나라 동지에도 붉은 팥죽을 문설주나 벽, 기둥에 뿌려 나쁜 기운을 막는 풍습이 있는데 이것이 예전엔 피였다고 한다. 검은 모자를 쓰는 것, 수염을 기르고 족보를 존중하는 것, 큰절하는 법 그리고 남북 분단의 역사 등. 무엇보다 타국의 지배를 받은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일제 36년이지만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무려 430년을 노예로 산다. 그러다가 출애굽을 하고 광야로 들어간다. 변심한 애굽의 군사들이 뒤를 쫓는 진퇴양난의 위협 속에서 하나님은 홍해를 갈라 그들을 전격적으로 살려내신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는 기적을 체험하며 그들은 들떠있었고 너무도 행복 했을것이다. 하지만 이후 이어진 행군 3일 동안 물 한 방울을 마실 수가 없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러던 터에 우물을 만난다. ‘마라’란 지역이었다. 그러나 막상 마시려 하니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마라’란 원어로 ‘쓰다’는 뜻이고 포괄적으로 ‘괴로움’ ‘고통’ ‘불행’등의 의미를 지닌다. 천신만고 끝에 찾아낸 우물이 오염되어 마실 수 없었을때에 그들의 절망감을 극에 달했을 것이다. 이에 모세가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한 나무를 지시하여 그 가지를 던지니 물이 달게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마라를 지나 당도한 곳이 엘림이다. 그곳에는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기가 막힌 오아시스였다. 얼마나 좋았을까? 그곳에 머물면서 이스라엘 12지파는 우물 하나씩을 배정하고, 70명의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종려나무 한 그루씩을 배정하여 그 밑에 천막을 치고 쉴 수 있게 하였다. 그 뒤로 “엘림”은 ‘안식과 행복’을 나타내는 말로 쓰여지고 있다. 마라는 끝이 나고 새해에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엘림에 당도하기를 소망한다. “킴 윅스”(女)라는 시각장애인 성악가가 있다. 한때 빌리그래함 목사 집회 시 간증자로 나서기도 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맹인 인 나를 인도할 때 ‘저 100미터 전방에 뭐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앞에 나타나는 장애물을 가르치며 구체적인 행동을 지시해 줍니다. 나는 그분을 신뢰하고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오늘 주어진 삶에 충실하며 그분을 따르다 보면 엘림에 당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황은 우리의 믿음을 앗아간다. 쉽게 끝나지 않는 팬데믹상황에서 우리가 취할 태도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지는 절망스러운 상황에 휘둘리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전에 나를 인도하신 주. 장래에도 굳건하게 붙들어 주실 것을 믿는 것이다. 신앙은 환한 미래를 품게 한다. 남이 못 본 것을 보게 해준다.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오늘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어느새 엘림이 내 눈앞에 도래할 것이다. 마라는 이제 끝자락이다. 엘림이 저만치 보이기 시작한다. 새해에는 모두 마라를 지나 엘림을 체험하는 복된 은혜가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