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벽두 아가 ‘정인’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천진난만한 미소로 재롱을 부리는 아가의 모습, 겨우 18개월밖에 살지 못하고 떠나간 생명을 보며 세상이 얼마나 악해졌는가를 실감했고 그렇게 태어나 떠나가는 아이들이 더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밀려 왔다. 사실 ‘정인’이 숨진 것은 지난해 10월이다. 그럼에도 이제야 이슈가 되는 것은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속속 드러나는 아가를 향한 지속적인 폭행의 흔적과 그들이 목회자의 자녀들이라는 것 때문이다. 타종교 지도자나 신도들의 실수가 나올때는 대중들이 그리 큰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다. 하지만 목사나 기독교인들의 일탈은 커다란 뉴스거리가 된다. 한편으로는 불합리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만큼 기독교에 대한 기대치가 높다는 것을 반증한다.
“자식은 내 맘대로 안된다”는 말이 있다. 모든 부모들은 온 정성을 다해 아이들을 키운다. 삶의 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열심히 사업을 하고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다 가정경제를 풍요롭게 하기 위함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부모들의 공통소원이다. 건강하게 잘 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선하게 성공하고 자신의 꿈을 펼치는 모습을 보이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런데 그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없다’고. 자식이 평탄하게 성장하여 어엿한 사회인으로 살아가기까지는 엄청난 정성과 보살핌이 필요하다.
드러나는 ‘정인’의 양부모가 저지른 악행에 분노하다가 그 부모들을 생각해 보았다. 평생을 목회하며 살아왔을 그들의 삶이 자식들로 인하여 한순간에 무너지는 아픔을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고이 길러온 자식들이 어린 입양아를 죽인 피의자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는 모습을 보며 허망함에 사로잡혀 있으리라! 성도들 앞에서 무슨 면목으로 고개를 들고 설교를 할까? 쏟아지는 뉴스와 SNS의 날카로운 비난의 글을 읽으며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은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을 대하며 어느 누구도 자식 얘기를 쉽게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실감한다.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 그리고 오늘 살아가는 모든 것은 은총이요, 최고의 선물이다. 우리는 날마다 불평하며 산다. 남이 가진 것을 내가 누리지 못함에 아쉬워하고 세상은 너무도 불공평하다고 타박하며 날을 이어간다. 하지만 이 나이만큼 내가 내 삶을 이루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으며, 넘어지면 또 일어나던 아픔의 경험이 있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삶, 그 자체가 완전한 선물이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감사를 잃어버리고 산다. 사람들은 대부분 소유에 감사한다. 무엇을 얻었거나, 선물을 받았거나, 돈을 벌었거나, 새 자동차를 샀거나, 승진을 했거나, 경기에서 이겼거나 등등.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살아가며 요구하는 것에서보다 감사해서 얻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말이다. 요구를 하다 보면 더 인색해지고 완고해지고 난폭해지고 거만해 진다. 반면 감사하다 보면 더 풍성해지고 부드러워지고 따뜻해지고 겸손 해 진다. 드러난 사실을 통해 추정해 보면 ‘정인’의 양부모는 지금 있는 것에 만족을 못하고 살았던 것 같다. 명문대학교 C.C로 만나 부부가 되기까지, 목회자 가정에서 살아오며 그들이 놓친 것은 자족의 비결이었다. 조금 더 가지려하고, 누리려하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다가 그들은 독선에 빠졌고 고귀한 한 생명조차도 도구화 해 버렸던 것이다. 내 행복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희생시키려고 했던 위험한 발상이 온 집안을 몰락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삶은 선물이다. 선물은 기쁘고 행복한 것이다. 선물을 누리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금수와 같다. 2021년은 작년에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년이요,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었다. 그 날을, 그 순간을 우리는 살고 있다. 이것이 은총이요, 기적이다. 내가 누리고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바로 현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