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바야흐로 졸업시즌이다. 하지만 금년은 COVID-19 여파로 빛이 바랬다. 4년의 학업을 마치고 졸업하는 모습은 가족들이나 주위 사람들의 눈에도 귀해 보이거니와 스스로도 커다란 성취감을 맛보는 소중한 시간이다. 하지만 험난한 시국을 만나 영상으로 졸업식을 맞이하고 있다. 꽃다발도, 어머니에게 사각모를 씌워주는 흔한 풍경도 자취를 감추었다. 내 모교도 졸업생 대표 23명만이 넓디넓은 강당에 흩어져 앉아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실로 황량하기 그지없는 광경이다. 언제나 이런 처참한 세월이 막을 내릴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한상근씨에게는 졸업이란 의미가 남다르다. 한씨는 서울대가 처음 실시한 장애학생 특별전형을 통해 입학한 7명의 학생 중 유일한 졸업생이기 때문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를 앓아 두 발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지체장애 2급이다. 다리 근육이 계속 수축해 근육이완 수술만 벌써 두 번이나 받았다. 그에게 힘이 되어준 이는 바로 어머니였다.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전국을 떠돌았고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아들을 업고 등 · 하교를 감당했다.
아들을 향해 늘 “스스로 장애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영원히 장애인이 될 수밖에 없다. 넘어져도 혼자 일어날 수 있도록 강해져야 한다”며 아들을 채근했다. 한 군은 전북대 정치외교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장애의 벽을 넘지 못하고 번번이 취업에 실패했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대 법대에 합격하게 된다. 그러나 첫 학기를 맞은 한 씨는 주위의 지나친 관심이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넓은 교정에 계단까지 많다보니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돌아다니며 수업을 듣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3∼4층 강의실 수업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한 것은 ‘장애인이라는 특혜로 입학한 것이 아니냐?’는 곱지 않은 주위의 시선이었다. 또 과제물이나 시험 답안지 작성 시 일반학생에 비해 2∼3배씩 시간이 더 들지만 이를 고려하지 않는 교수들도 야속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 3∼4시간만 자면서 공부에 매달린 끝에 4년간의 학교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졸업을 앞둔 한씨는 지난해 12월 200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IBM 재무기획 파트에 당당히 합격했다. 일반 지원자처럼 서류전형과 면접을 치렀고 이후 적성시험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이다.
그는 뒤를 따라오는 후배 장애 학우들에게 ‘나는 이건 못 할거야’ ‘여기까지는 할 수 없어’라고 자책하며 스스로를 가두지 말라고 충고한다. “장애인이 편하면 비장애인은 더 편한 세상이 된다”고 강조했다. 장애를 가지고 현실에 벽에 도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벽을 넘어가는 장애인들이 있기에 인생은 아름다워 보인다. 나의 초등학교 선배요, 이미 고인이 된 강영우 박사는 15살에 축구공에 맞아 시력을 상실하는 불운을 겪는다. 이 사고가 나기 얼마 전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 충격으로 어머니가 숨지고 누나까지 과로로 죽는 고난이 겹친다. 결국 삼남매는 서로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학문을 갈망했던 그는 점자를 배우며 대학을 목표로 공부하게 된다. 그는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대학 원서접수를 거부당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결국 연세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낮은 체육학점에도 불구하고 차석으로 졸업을 하게 된다. 한국 장애인 최초로 미국 유학길에 오르면서 피츠버그대학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까지 얻었다. 이후 2001년부터 2009년까지 조지 W. 부시의 부름으로 미국 국무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분과위원장(차관보 해당 보직급)를 역임하는 대단한 발자취를 남긴다.
장애는 감당하기 힘든 벽이다. 하지만 그 벽을 넘어서는 순간, 상상하지 못할 삶의 희열과 감격이 있다. 돌아보면 그때 그 순간들을 어떻게 감당했는지 감회가 밀려온다. 극한 환경 앞에 굴복하지 않고 과감히 도전함으로 역경을 단 열매로 바꾼 그들이 진정한 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