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세월

by 관리자 posted Mar 1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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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풋한 젊은시절.jpg

 

 

 세월의 흐름은 두려울 정도로 빠르다. 팬데믹에도 한해가 바뀌고 또다시 봄기운이 움트고 있다. 눈과 강풍, 날마다 번져가는 역병. 살면서 이렇게 답답하고 곤고한 때가 있었을까? 초반에는 당황함으로, 시간이 지나며 현실을 받아들이며 체념하다가도 희망의 줄을 놓지 않으며 꼬박 1년이 지나갔다. 하기야 얼마나 많은 계절을 반복해 지나치며 오늘에 이르렀던가? 겨울이면 추워서 몸을 움츠리며 살던 때가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마당에 나가면 엄마는 세숫대야에 뜨거운 물을 받아 준비해 준다. 서둘러 세수를 하고 등교를 해야 함에도 물에 손을 담근채 멍 때리고 저만치 모이를 쪼고 있는 새들을 바라본다. 엄마의 큰소리에 놀라 고양이 세수를 하고 물기를 머금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으면 쩍쩍 달라붙는 과정을 겪어야만 하였다. 그래도 그 시절의 겨울은 싱그러웠다.

 

  이제는 그렇게 추위와 친근할 필요가 없다. 온도만 높여놓으면 실내온도는 절로 올라가고 목욕탕에 수도꼭지를 돌리면 원하는 온도만큼 시원하게 물이 쏟아진다. 샤워를 마치고 거울을 보며 한마디 한다. “아니, 언제 그렇게 나이를 먹었니?” 거울 속에 내가 웃고 있다. 지난 4일 결혼 35주년을 맞이하였다. 29에 아내를 만나 짧고도 찐한 연애를 하고 서둘러 결혼을 했다. 그때는 노총각 소리를 듣던 때였기에. 소박하고 가난한 신혼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여동생까지 함께 했던 신혼은 실로 아슬아슬했다. 고부와 시누이 올케 사이에 끼인 남자의 처절함을 실감했다. 돌아보면 집이라도 넓든지 경제적 여유가 있었더라면 갈등은 조금 완화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밀려온다.

 

  결혼하자마자 아내는 임신을 했고, 입덧에 힘겨워하며 다가온 더위에 허덕이고 겨울이 되어 이듬해 출산을 하게 된다. 우리를 닮은 첫아이의 재롱에 시름을 잊으며 성역의 사명을 감당하였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 채 돌이 되기도 전에 담임목회가 시작되었다. 새벽기도 인도차 교회에 나오면 하루종일 머물며 목회에 전념하였다. 그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앞만 보고 달리던 때가 내 나이 30대 후반이었다. 주일 아침이면 교회 봉고차를 몰고 주일학교 아이들을 태워 나르고, 온종일 성도들의 마음을 보듬어주어야 하는 아내의 짐은 무겁고 버거웠으리라. 그때는 그것을 헤아릴 생각은 못했다. 사모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가 저만치 잡힐 듯한데 어느새 35년의 세월이 흘러버렸다. 장성하여 결혼을 하고 듬직한 사위들과 알콩달콩 살아가는 딸들을 보며 우리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하는 생각이 밀려온다. 얼마 전 가족모임에서 내가 외쳤다. “얘들아, 우리도 바라만 보아도 눈에서 꿀이 떨어지던 때가 있었다” 35년의 세월이 그런 분위기를 많이 희석시켜 놓았지만 우리 둘만이 아는 인생을 살아오다보니 이제 표정만 보아도 서로의 마음을 아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가끔 아내에게 물을 때가 있다. “당신, 그때 뭘 믿고 나에게 시집을 왔어?” 장애, 가난, 홀어머니. 실로 악조건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내 곁에 다가왔고 부부로 오늘을 맞이한다. 대답 대신 웃어주는 아내가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밀려온다.

 

  결혼기념일 오후에 서로가 외쳤다. “와우, 35년을 함께 살았네. 이제 5년 지나면 40년이네한참을 웃었다. 부부는 사실 남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부가 되고 자식을 낳고 평생을 함께한다. 처음 만나 짜릿짜릿하지 않은 신혼이 있을까? 실로 산전수전 다겪으며 부부는 성숙되어 간다.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세월은 신비 그 자체이다. 신혼의 풋풋함, 중년의 농후함, 그리고 이제 익어가는 노년까지. 아내가 있어 행복하다.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야 할 사람- 바로 곁에 있는 남자(여자)이다.

 

 수줍음 속에 서로를 알아가고, 아이들을 키우며 성숙해 가는 부부야말로 신기하고 흥미진진한 영화이다. 내가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고 내 아픔을 진정으로 부둥켜 안고 갈 사람. 마지막 내 삶을 곁에서 지켜줄 사람도 부부이다. 다들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