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끊임없는 도전으로 이어진다. 반복되면 능숙해지기도 하련만 고비를 넘어서면 더 높은 능선이 길을 막는다. 그 과정을 거치며 때로는 성취감에 행복해하기도 하지만 실패의 아픔을 겪으며 뒹굴어야만 한다. 거절과 실패는 익숙해질 수 없는 끈질긴 친구이다. 우리 세대는 중 ‧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러야 하였다. 또한 중학교 진학도 못하고 멈추어야 하는 아이들이 너무도 많았다. 양평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이제 서울진학을 계획하는 단계로 접어든다. 하지만 경기도 출신이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았다.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 아무리 눈을 비비고 찾아보아도 내 수험번호를 발견할 수 없었을 때 처음 한강이 보였다. 그냥 죽고 싶었다. 장애의 악조건을 무릎쓰고 공부에 전념했던 결과가 낙방으로 나타났을 때 생을 포기하고 싶었다. 내 자존심은 산산히 부서졌다. 큰 기대를 하던 친척들의 조롱섞인 말과 따가운 시선이 나를 힘들게 했고, 지인들의 위로는 나를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커다란 손으로 내 오른 어깨를 움켜쥐며 “남자 자식이 그 까짓 것 가지고 기가 죽냐?” 힘을 주셨다.
중학교에 비해 고교생활은 공부보다는 다른 곳에 더 관심이 많았다. KSCF 서울연맹 회장으로 선출되며 견문을 넓혔고, 전국에 친구들이 생기는 행운을 안았다. 덕분에 고교시절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대학입학은 좌절되었다. 대학입학에 실패한 후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친구들처럼 군대도, 취업도, 재수도, 아르바이트도 내게는 먼 나라의 일이었다. 같은 셋방에 사는 딴따라 형을 따라 밤마다 노래를 부르러 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내 삶의 암흑기라고나 할까?
사촌 형이 딱한 사정을 알아차리고 사당동 소금공장에 나를 소개시켜 주었다. 버스를 타고 찾아간 소금공장 마당을 한참이나 서성이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전에도 누군가의 소개로 취직을 해 보려 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한 일들이 나를 주눅 들게 했다. 그날도 도저히 공장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림은 똑같았다. 사장을 만나 “누구 소개로 왔다”고 인사를 한다. 다리를 몹시 절며 들어선 나를 한번 훑어보고는 고개를 내젖는다. 그때 등뒤에서는 땀이 흐른다. 돌아서서 나가야 하는 나의 처지가 서럽다.
인간사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부탁과 거절인 것 같다. 일본인 소설가 소노 아야코는 <약간의 거리를 둔다>는 책을 통해 “사람 관계는 지나치게 관계가 깊어져 서로에게 어느덧 끔찍할 정도로 무거워진 덕분에 문제가 생긴다. 사람이나 집이나 약간의 거리를 둬야 통풍이 될 공간이 생긴다”라고 했다. 어린 시절부터 사랑을 많이 받고 의사 표현을 자유롭게 하며 산 아이는 거절을 당해도 그렇게 큰 상처를 받지 않는다. 하지만 부모에게, 형제들에게, 학창 시절에 왕따(따돌림)의 상처를 지닌 사람은 거절당하면 굉장히 힘들어한다. 그 충격을 버텨낼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교회나 단체, 직장에서 쉽게 상처를 받고 실족하게 된다. 아무리 익숙해지려해도 거절은 아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누가 뭐라하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그룹토의 시 누군가가 자기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든지, 이성교제를 하는 동안 상대가 자신을 소홀히 한다든지, 부부 사이에 조금 서운한 일이 생겨도 견디지 못한다. 따라서 상대가 기대만큼 반응을 하지 않을 때 오로지 자신의 느낌으로 사람을 물려내는 우를 범하기 십상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항상 Top 위치에 서 있던 사람은 한번의 거절로 무너질 수도 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항상 지지해주고, 사랑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아무리 익숙해 지려해도 거절은 아프다. 정말 아프다.
사람은 거절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거절 이후에 나타난 반응이 삶을 규정한다. 시간이 지나고나면 그 거절이 나를 성숙하게 했음을 깨닫는 것-이것이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