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지성, 이성, 감성을 가지고 있다. 이 성향이 얼마나 조화로우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성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눈과 귀, 촉감을 통해 판단하고 결정한다. 너무도 불확실한 것임에도 완벽하다고 생각하며 생을 이어간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위에 있는 것이 영성이다. 밀레니엄 시대에 접어들며 내가 몰입했던 것은 영성이었다. 목회를 하면 할수록 잡힐 듯 안잡히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교회는 성장하는데 내 마음은 채워지지 않은 갈증이 있었다. 기도원에 올라 금식을 하고, 부흥집회에 참석하여 강사의 뜨거운 메시지를 가슴에 담는 것이 그 당시 영성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이제 다른 것을 찾기로 한 것이다. 그러다가 만난 소중한 친구가 최일도 목사이다. 그는 처음 버려져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노숙자들에게 밥을 배급하는 것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청량리 윤락가 중심의 전도를 하며 죽을 고비도 여러번 넘겨야 했다. 대광고등학교 강당을 빌려 목회도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가 알아차린 것은 현대인의 영성 결핍이었다. 경기도 설악에 묵안리 영성수련원을 설립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이끄는 영성수련을 통해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자신을 얽매이고 있던 올무에서 벗어나는 기적을 체험하고 있다.
감성은 한마디로 느끼는 것이다. 잘 느낄수록 생각과 지식에 갇혀 있던 나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이다. 수련회 중에는 밥상을 앞에 놓고 느끼는 시간을 가진다. 색깔, 냄새, 모양, 맛을 보며 음미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왔을까?’ 묵상한다. 매일 대하는 밥상인데 영성이 뚫리고 나면 모든 것이 새롭다. 깊은 바다에서 낚아올린 고기가 내 입으로 들어온다. 온갖 푸성귀에 심오한 맛이 입안에서 버무려지며 조화를 이룬다. 신기하다. 서로 다른 것이 어우러지며 느낌을 새롭게 한다.
충남 금산 대둔산 자락에 위치한 영성수련원에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였다. 하루종일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 산파에게 짜증을 내다가 견디고 견딘 끝에 터져나오는 눈물, 그리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지금까지 오직 생각과 판단으로만 살아오던 내 삶이 느낌과 경험으로 전환되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된다. 실컷 웃고 울었던 그 순간이 내 영성을 새롭게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시작되는 웃음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울음도 단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온몸의 몸부림이었고 춤은 영혼의 신들림이었다. 실로 산다는 것이 행복이요, 살아 있음이 축복이요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내가 만날 수 있는 보배임을 깨달았다. 영성이란 결국 나를 찾는 작업인 것이다.
영성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잘 듣는 자세이다. 소리를 통해 깨어나는 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일어나는 소리를 지금 듣지 못한다. 왜? 생각에 붙잡혀 있어서 그렇다. 그 안에 갇혀 있고 그런 자신에게 집착해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감성이 깨어나면 ‘지금 여기(Hear & Now)’를 느끼게 된다.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소리를 듣고 사실의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영성의 핵심이다. 이것을 놓치면 감성이 무뎌지거나 굳으면 삶에 위기가 온다. 그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마음을 부드럽게 해야 한다. 음악을 듣고 그림을 감상하고 또 글을 쓰고 자연과 친밀함을 나누면서 말이다. IQ, EQ, 이제는 SQ(Social Quotient:사회지수)를 이야기한다. 감성만으로는 안된다. SQ는 영성지수(Spiritual Quotient)와 비슷하다.
원래 ‘기독교 영성’이라고 하는 단어 ‘Spirituality’는 ‘사회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뜻이다. 이 세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걸 의미한다.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모르고,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인지 모른다면 그건 영성지수, 사회지수가 낮다는 증거이다. 그런 사람은 성공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다. 생각해보라! 내 곁에 있는 아내와, 매일 같이 얼굴을 맞대고 함께 일하는 동료, 팀원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지 않는데 무엇이 잘될 수 있겠는가? 영혼의 서재에 들어가 진짜 나를 만날때에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