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만남으로 생이 이어진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이 있다. 같거나 비슷한 부류끼리 어울리는 것을 뜻한다. 학창시절이 생각난다. 어쩌면 그런그런 아이들끼리 그렇게 어우러지는 것을 보았다. 대화의 수준도 그랬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좋은 학군을 권하며 사는 것 같다. 사람은 스스로 대단한 존재로 안다. 그 누군가보다는 자신이 낫다고 생각하며 산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라!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내 수준이다. 내 얼굴을 스스로 볼 수 없듯이 다른 사람을 통해 나를 투영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경기도에서 태어나 자라 고등학교부터 서울에서 30년을 살다가 미국이민을 왔다. 그러기에 거의 서울 테두리에서만 살았다. 내가 자란 홍릉교회는 이북에서 피난 온 분들이 세운 교회였다. 담임목사님도 선천출신이었다. 해서 평안도 말은 원없이 들었다. 그러다가 신학대학원에서 팔도사람을 만나는 다양성을 경험하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학우들의 억양은 정말 강했다. 그렇게 3년을 함께 공부했는데 여전히 동향끼리 관계가 끈끈하게 이어져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면서 서울 곳곳에 교회를 관찰하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담임 목사의 고향에 따라 교회구성원이 압도적으로 몰려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익숙함과 편안함 때문이다.
신대원 2학년 때로 기억한다. 지방 도시에서 한 주간을 보내게 되었다. 버스를 타도, 시장과 각처를 다녀도 온통 사투리뿐이었다.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이것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이 안간다. 실로 머리가 아플 정도로 사투리 억양이 버거웠다. 그러다가 한 식당에 들어섰다. “어서오십시오” 앗! 서울 말투였다. 대번 물었다. “어떻게 서울말을 쓰느냐?”고. 주인이 웃으면서 대답한다. “고등학생 아들이 야구선수인데 이곳에 야구명문이 있어 전학을 오게 되었고 내친김에 식당을 열게 되었노라”고. 정말 반가웠다. 그러면서 아, 이것이구나! 깨달았다. 만나는 사람이 편안한 이유는 그 사람과 내 정서가 같다는 증거이다.
조금 다른 차원이지만 미국에 온 지 40여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사투리억양을 쓰는 분들을 본다. 영어도 그런 리듬으로 구사한다. 참 신기하다. 6, 70년대만 해도 이민자들이 많지 않아 생존을 위해서 영어를 배우고 사용하여야만 했다. 그런데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사투리 억양은 버려지지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만남의 필연성이다. 사람은 단순하다. 짐승을 만나면 짐승이 되고 신을 만나면 신이 된다. 짐승을 만나면 짐승의 소리를 하고 신을 만나면 신의 소리를 하게 된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이렇게 달라진다.
삶은 관계이다. 삶은 만남이다. 누구를 만나서 어떤 관계를 하느냐가 바로 나의 삶이 되고 결국은 내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다 자기의식의 수준대로 살게 된다. 그 수준대로 들리며 보이게 된다. 내가 후배 목사들을 만나면 하는 소리가 있다. “교인들이 내 설교를 다 듣는다고 착각하지 마라. 자기의식과 수준으로 듣는다. 듣기 싫은 소리는 자동적으로 걸러낸다.” 극단적인 말 같지만 사실이다. 뿐만 아니다. 자기 의식의 수준대로 말을 하고 살게 된다.
삶을 다채롭고 풍성하게 하려면 다른 의식 수준의 사람을 만나야 한다. 이왕이면 나보다 더 높은 의식 수준의 사람을 만나야 한다. 나보다 더 높은 의식 수준의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 즉, 선생님, 전문가, 도인을 찾아다니는 것이 공부요, 훈련이요, 수행이요, 수련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노인이 아니고 나이가 들어 아예 배우려하지 않는 사람이 노인이다. 공부를 멈추고 훈련을 하지 않고 수행, 수련을 하지 않는 사람은 퇴행하거나 퇴보한다. 아니 타락할 수도 있다. 하기야 그런 줄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기도 많다.
누구나 사용하는 핸드폰이나 컴퓨터도 업그레드를 시켜 주어야 한다. 신기하게도 요사이는 스스로 업그레이드를 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고 기존것을 그대로 사용하면 업데이트된 자료를 받을 수가 없다. 사람의 의식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상태에 만족하면 안된다. 뛰어올라야 한다. 스승을 만나야 한다. 그러면 아주 손쉽게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경험하고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