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 환경과 상황에 적응하게 되면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민은 삶의 축을 흔드는 엄청난 결단이다. 일단 이민을 왔으면 이곳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오랜 세월 미국에 살고 있지만 항상 한국을 그리워하며 산다. 드라마도, 영화도 요사이 흔한 유튜브도 한국 것만 즐겨본다. 물론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세대나 영어가 더 편한 분들은 예외이겠지만 말이다.
향수병도 치료하고 내가 태어나고 자란 그곳이 그리워 한국으로 향한다. 하지만 희뿌연 하늘과 매연, 숨막히게 바삐 돌아치는 분위기에 금방 질리고 만다. 그러면서 숲에서 뿜어내는 신선한 공기와 푸른 초원이 무한히 펼쳐진 필라델피아에 익숙해진 나를 발견한다. 추억을 찾아 여러 곳을 다니고 많은사람들을 만나지만 ‘나는 영원한 이방인’임을 실감할 뿐이다. 한국에 가면 금방 미국으로 오고 싶고, 미국에 살면서 여전히 고국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는 이민자들의 모습이 애달프다. 이민 온 햇수가 더해갈수록 한국 사람도, 그렇다고 미국 사람도 아닌 어정쩡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 <미나리>를 보았다.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여배우의 연기에 기대를 걸며 115분을 집중하여 감상을 했다. 영화는 집이야기로 시작한다. 가장이 깊은 생각 끝에 장만한 집은 컨테이너 집이었다. 바퀴가 달린 집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애처롭다. 이민을 와서 애쓰는 딸의 가정을 위해 한국에서 엄마가 온다. 손자손녀를 돌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언어와 문화가 맞지 않는 손주들과 벼라별 해프닝을 겪으며 서서히 정이 들어간다. 갑자기 전기가 나가고 암흑 속에서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토네이도의 진행경로를 TV로 지켜보는 장면은 바로 이민자들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병아리감별사’는 80년대 이민자들이 택했던 직업이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장애인 형이 미국에 가서 그 직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사실 6-70년대에 이민생활은 “쓸고 다닌다”로 시작하여 “누비고 다니다”가 결국 “주름잡고 다닌다”가 성공담이었다. 바로 청소업, 봉제공장, 세탁소를 지칭하는 말이다. 일단 이민을 오면 경력과 학력이 사라진다. 언어도, 문화도, 눈에 들어오는 모든 광경들이 낯설다. 그 시절에 이민을 온 분들은 거리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너무도 반가워 끌어안고 울었다고 전해진다. 어느 순간 늘어난 한인사회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 동포라는 현실이 서글프다.
손자 데이빗의 심장병, 뇌출혈로 건강을 잃어버리는 엄마. 우여곡절 끝에 삶의 기반을 잡았나보다 했더니 화마(火魔)가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장면이 한숨이 나오게 한다. 이민가정을 들여다보면 끝없는 어려움이 밀려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토네이도가 자연재해라면 화마는 전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과 사고의 상징이다. 칠순 여배우에게 여우주연상을 수여한 이유는 잃어버린 엄마의 자리와 정신을 부각시켜 주었기 때문인 것 같다. 누가 뭐라든 묵묵히 자녀들을 바라보며 언제라도 기댈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내어주는 존재가 엄마이다. 윤여정을 통해 바로 우리 엄마의 모습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베테랑 감별사인 제이콥이 잠시 휴식을 취하러 밖으로 나왔을 때 공장 굴뚝에서 나는 시커먼 연기를 보며 아들 데이빗이 묻는다. “아빠, 저 연기는 뭐야?” “응, 그건 수놈을 폐기 처분하는 거야. 수놈은 맛이 없거든. 또 알도 못 낳고. 아무 쓸모가 없어. 데이빗! 그러니까 우리는 꼭 쓸모가 있어야 돼. 알겠지?” 섬뜻했다. 엄마의 미나리는 아이들이 위험해서 접근을 금지한 변두리의 땅, 뱀들이 사는 버려진 땅에 심어진다. 화마가 휩쓸고 지나가고 엄마는 반신불수의 몸이 되었지만 그녀가 심어놓은 미나리는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한다.
누군가 돌보아주지도 않는 버려진 듯한 시냇가 우묵진 곳에서 미나리는 얄미울정도로 퍼져나간다. 낯선 환경에서도 강인함과 끈기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번성하는 이민자의 모습이 미나리로 투영되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