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젊다고 우기면 우길 수도 있는 나이지만 생을 되돌아보면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아련한 추억이 있다. “마음은 청춘이라”는 말이 나이가 들수록 실감이 난다. ‘나이 들어감’에 대해 이젠 체념을 해야만 할 것 같다.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나는 공부하고 있는지?’ 번민과 고통 속에서 밤을 지새우던 때가 있었다. 고교 시절, 어느 날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대지를 적시고 있던 밤 10시. 공부하던 머리를 식힐 양으로 여느 때처럼 라디오의 스위치를 켰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내 온몸을 얼어붙게 했다. 기차소리 음향이 오버랩 되며 DJ의 멘트가 이어진다. “밤의 플랫홈!” DJ는 김세원 씨였고, 시그널 음악은 “이사도라”였다. 그날부터 난 그 프로의 고정 팬이 되었다. 음악 “이사도라”는 그렇게 나에게 찾아와 꿈을 주고 환상의 세계로 나를 인도했다. 김세원 씨의 차분한 목소리와 절제된 말투는 프로그램을 고급스럽게 손질 해 나아갔다. 당시 “이사도라”를 연주한 악단은 「폴 모리아」 악단이었다. 폴 모리아 악단의 인기는 대단했다. 방송국마다 폴 모리아 음악을 많이 내보냈다. “이사도라”를 들으면 기차를 타고 먼 미지의 세계로 떠나가는듯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기차가 멈추고 어느 역에 내려 깊은 산속에 들어가는 느낌도 생겨난다. “이사도라”를 만나 꿈을 꾸고 방송국에 엽서를 보내며 내 사춘기 막바지는 아름다운 수채화처럼 영롱하게 수놓아졌다.
고교시절, 인기 있었던 라디오 심야방송 프로그램 중 아직도 그 타이틀이 살아있는 ‘별이 빛나는 밤에’(MBC)와 ‘밤을 잊은 그대에게’(TBC), 그리고 동아방송(DBS)의 ‘0시의 다이얼’, 기독교 방송의 ‘꿈과 음악 사이’가 기억난다. 특히 동아방송의 심야시간 프로그램의 인기는 막강했다. 10시 무렵 김세원 씨의 ‘밤의 플랫폼’이 끝나면 이어지는 ‘0시의 다이얼’. 당시로는 파격적인 노래 ‘그건 너’를 부른 가수 이장희씨가 DJ 였다. 콧수염을 기르고 가죽잠바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는 그의 존재는 여학생들뿐만 아니라 남학생들의 마음도 흔들어 놓았다. 그리 미남도 아닌 이장희 씨는 콧수염까지 길러 강렬한 인상을 풍겼지만 목소리는 그렇게 감미로울 수가 없었다. 친구들과 만나면 이장희의 흉내를 내느라 “0시의 다이어~ㄹㄹ”하며 혀를 굴렸다. 새벽 1시까지 이어지는 심야방송을 들으며 이불 속에서 웃고 울었던 기억이 새롭다.
어느 날 밤,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 최인호, 영화감독 이장호, 여배우 안인숙씨를 ‘별들의 고향’ 촬영 현장과 전화로 연결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으며 내 가슴은 뛰었고, 사이먼& 가펑클, 비지스, 비틀스의 노래들을 들으며 하염없이 멍하니 앉아있던 밤도 있었다. 여학생이 보낸 엽서 사연을 들으면서 ○○여고의 방송제가 언제 있는지, ‘문학의 밤’이 언제인지도 알 수 있었으니,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없던 그 시절 라디오는 유일한 정보 획득 수단이기도 했었다.
당시 가정에는 주로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있었다. 라디오는 작았지만 소형 ‘배터리’로는 몇 시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라디오 크기의 2, 3배나 되는 대형 배터리를 라디오 뒤에 부착시키고 검은 고무줄로 칭칭 동여매었다. 지금처럼 깨끗한 음질의 디지털 사운드는 상상도 못했고, ‘지직’거리는 라디오 소리, 더군다나 방송국에서 틀어주던 LP 판도 상태가 좋지 않아 음악이 나가는 도중 ‘툭툭’ 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정서적으로는 풍족했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음악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 음악 신청 엽서를 보내놓고 친구들에게 “음악을 듣고 자라”고 당부를 했건만 방송이 다 끝나가도 소식이 없었다. 오기가 나서 보내고 또 보내다가 드디어 내가 신청한 곡이 방송에서 흘러나올 때 온방을 길길이 뛰며 마냥 행복 해 했다.
신세계 백화점에서 엽서 전시회가 있다고 해서 가보고서야 깨달았다. 얼마나 엽서에 공을 들여야 DJ가 곡을 틀어주는지. 매주 화요일 필라기독교방송을 통해 송출되는 “밀알의 소리” 시그널은 그래서 “이사도라”이다. “이사도라”를 들으며 나는 오늘도 소년의 마음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