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소중한 제자들이 많이 있다. 철없던 20살, 반사를 하며 가르쳤던 주일학교 아이들부터, 22살 교육전도사가 되어 지도하던 학생들. 26살부터 지도했던 중 · 고등부 청소년들. 그리고 30이 넘으며 지도하던 청년대학부까지 많기도 많다. 하지만 지금은 연락이 닿는 아이들은 극히 드물다. 세월의 흐름이 큰 원인이지만 내가 미국으로 온 시점에 한국 지역 번호와 국번이 크게 달라지며 가속이 붙어버렸다. 하지만 ‘경화’는 여전히 존경의 메시지를 전해오며 기도로 만나고 있다. 경화와 내가 만난지 어언 40년이 가까워오고 있다.
내가 동부교회에 부임했을때에 경화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청초하고 영리한 인상의 아이였다. 어린 나이에도 믿음이 깊고 언제나 열심이었다. 내가 그 교회를 사임하고 본격적인 목회를 시작할 때 경화는 여고 2학년이 되어 있었다. 이후에도 변함없이 나를 챙기고 따랐다. 경화가 함께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착하디착한 신랑을 만나 결혼을 했을때에 얼마나 흐뭇하고 대견했는지 모른다. 항상 안부를 물어오며 내 목회에 힘을 주는 경화는 ‘스승의 날’이 되면 어김없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어느 해 던가? 만삭의 몸으로 “스승의 날” 무거운 선물꾸러미를 머리에 이고 4층 계단을 올라온 모습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놀란 눈으로 나무라는 나를 바라보며 “목사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하며 겸연쩍게 미소짓던 경화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경화가 금년 스승의 날에도 카톡으로 메시지를 보내오며 통장에 입금을 해 왔다. 해 준것도 별로 없는데 기나긴 세월동안 챙겨주는 그 마음이 귀해서 모처럼 전화를 넣었다. “큰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했다는 소식. 어느새 50이 다 되었다”는 말을 들으며, 세월의 속도에 소름이 돋았다.
안타까운 소식은 “얼마 전 계단에서 굴러 다리가 부러지고 우울증이 와서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평생 어떻게 사셨어요?” 물어왔다. 제자의 아픔이 전이되어오기도 했지만 어떻게 사셨냐는 그 한마디에 내 삶이 스쳐지나가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기도를 해 주고 한국에 가면 만나자는 말로 통화를 마쳤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만큼만 안다. 내 아픔은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 고통의 시간을 잘 감당하며 넘어가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그 처지, 입장이 되어야만 비로소 그 심정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무거운 것을 들고 밀알선교센터 계단을 내려오다 발을 헛디뎌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손에 살점이 떨어지고 손가락이 제대로 구부려지지 않았다. 한참을 고생하며 평소 가까이 지내는 주바라기 “이지선”을 생각했다. 20대 꿈많은 여대 졸업반 불의의 교통사고로 화상을 입고 펴지지도 않는 손을 보며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렇게 곱던 얼굴이 화상으로 일그러지고 죽을만큼의 고통을 참아가며 온몸을 매일 소독할때에 지선이는 무슨 생각을 하며 견뎌냈을까? 말로 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며 이제는 한동대학교 교수로 후학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서있는 지선을 그래서 나는 존경하고 아낀다.
필라에서 가까이 지내는 선배 김 목사님이 갑자기 오른팔 어깨가 빠져 고생을 하고 있다. 워낙 건강 체질에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분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했는데 밤에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고통이 심해 병원치료를 거듭하고 있다. 전혀 아프지 않던 몸이 고통스러워지자 마음도 슬퍼졌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사모님을 돌아보게 되었다. 불치명 류마티스로 무려 20년 이상을 고생하고 있는 아내를 자신의 몸이 아파오자 자각을 하게 된 것이다. 잠자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측은하고 고맙다는 생각을 그제서야 하게 되었단다. 고집스럽던 그의 모습은 아픔을 통하여 아내에게 부드러운 남자로 다가가게 만들었다.
워낙 말이 없어 아내를 힘들게 하던 남편이 하필 더 말이 없는 사위를 맞이하며 장인의 심정을 헤아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동병상련이란 사자성어가 가슴을 스쳤다. 웃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