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사람이 없듯이 가고 싶을 때 가는 사람도 없다. 어느날 나는 지구별에 보내졌고 피부 색깔로 인해, 언어, 문화, 생활양식에 의해 분류되어 살아간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사람은 언제 행복할까? 소통이 잘 될 때이다. 주위에 사람들이 내 말을 들어주고 나를 인정해 줄 때 행복하다. 반면 왜 외로울까? 내 말을 들어줄 사람도 내가 기대고 감싸주어야 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서로를 알아가고 소중히 여기면서 정을 쌓아가야 한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관계가 있다. 바로 나이다.
나는 사역상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다양한 직업, 나이, 계층의 사람을 만난다. 그러면서 깨닫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너무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자존감’의 문제이다. 성장배경이나 학벌, 위치를 보면 전혀 열등감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이 낮은 자존감 때문에 힘겹게 살아가는 것을 발견한다. 반면, 내놓을 만한 것이 없는데도 당당하고 진취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만난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만나는 일이다.
거의 20년을 만나는 지인이 있다. 하지만 그는 한번도 자신의 이야기를 한적이 없다. 그래서 만난 햇수는 오래이지만 솔직히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한순간 그와의 만남이 피곤해졌다. 그럼 나는 어떨까? 어릴 때부터 나는 명랑한 성격이었다. 어디를 가든 분위기메이커였다. 언제나 모임에서 좌중을 사로잡고 흐름을 주도했다. 하지만 홀로 남았을때에 너무도 외로웠다. 목회도 그랬다. 애를 쓰고 최선을 다하자 교회는 성장해 갔다. 하지만 교회의 모습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내 가슴 한켠은 오히려 허전 해 졌다.
2,000년 밀레니엄 시대가 열리면서 내가 추구한 것은 영성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를 찾는 작업’이었다. 전문적으로 영성훈련을 하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내적치유를 받게 되었고, 숨어있는 내 속에 나를 끄집어내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분위기에 젖어들며 서서히 몰입을 하였지만 ‘내 안에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니, 거기까지 가기는 정말 싫었다. 하지만 강사의 집요한 인도와 둘러앉은 지체들의 도움으로 저만치 숨어있던 나를 만나야만 하였다. 어린시절. 수많은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고 있는 나. 무더운 여름날,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운동장을 휘청거리며 걷고 있는 나에게 다가갔다. “재철아, 힘들었지?” 그 말을 던지고 나는 뒹굴기 시작했다.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릴 정도로 장애로 인해 아파하던 나를 만나고 울고 보듬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나를 강사와 지체들이 하나씩 끌어안아 주며 위로해 주었다.
실로 깨어난 것이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왜 그렇게 하이퍼 되어 말을 많이 하고 있었는지? 왜 그렇게 분위기를 띄우려고 애를 썼는지? 나의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을 추스린 후에 진짜 나를 만나고 들어온 감정은 미안함과 부끄러움이었다. 내가 누구이고 어디 있는지를 모르고 살았다는 것, 아픔과 고독, 장애까지도 무엇하나 빼낼 수 없이 나를 나 되게 하는데 꼭 필요한 일이었다는 깨달음이 오는 순간, 하염없이 눈물이 솟구치고 가슴은 메어지고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다들 잠이 든 한밤중에 홀로 뜰로 나왔다. 휘영청 둥근 달이 떠있었다. 처음에는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쳐다보다가 무언가 아랫배에서 ‘욱’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미안함과 부끄러움이었다. 내가 지구에 왔는데 지구를 모르고 사는 것. 내가 나인데 나를 모르고 살아 온 것. 내가 인생인데 인생을 모르고 사는 것. 남은 위로하면서도 정작 나의 마음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살아온 것. 정말 미안하고 부끄러운 것이 아닐까? 길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그 길을 간 것의 차이를 아는 순간 우리는 놀라게 된다.
오늘은 내 생애에 처음 있는 날이다. 오늘은 오늘뿐이다. 들꽃의 계절이다. 돌보아주는 사람 없이 혼자서 들에 피는 야생화야말로 진정한 꽃이 아닐까! 나를 소중히 여기고 오늘을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