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세월은 덧없이 흐르고 있다. 인생을 살아가기도 버겁건만 난데없는 역병이 엄습하면서 여전히 사람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백신효과가 나타나면서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는가 했는데 여기저기서 돌파감염자가 나오며 한숨만 높아간다. 도대체 팬데믹은 언제나 깨끗이 사라져 갈까? 정말 매번 백신접종을 하며 이 세태를 버텨야만 하는가? 이런저런 고민에 휩싸이면서도 한걸음씩 내디디다보니 어느새 12월에 서 있다. 사계절의 변화 속에 시름을 잊고 달려온 한해였다. 백신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인증효과를 확인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서둘러 접종을 했다. 거리에 차량의 행렬이 늘어나고 Mall 주차장이 채워져가는 것을 보며 이웃의 소중함을 새삼 실감했다.
작년, 한창 바이러스가 번져갈 때를 기억한다. 출근하는 30분의 시간 동안 마주치는 차량은 드물었고, 스쳐 지나가는 주차장에는 드문드문 차들이 서 있었다. 갑자기 불안감이 밀려왔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복판에 서 있는 듯 하였다. 그렇게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만나고 싶고, 보고 싶어도 오갈 수 없는 상황에서 멘붕이 찾아왔다. 누구보다 멘탈이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매일 들려오는 확진자 소식과 한산한 거리를 보며 말로 표현이 안되는 답답함 속에 휩싸여 갔다.
뉴욕에서 목회하고 있는 친구 목사가 ‘COVID-19에 감염되었다’는 소식은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친구 사모로부터 연락을 받고 아내에게 “박 목사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응급실에 들어갔대”라고 말하며 내 뺨에는 이미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헤아려보니 우정을 나눈지 어언 40년이다. 누구보다 튼튼하고 건강하던 친구였다. 얼마나 기도를 했는지? 얼마나 하나님께 매어 달렸든지? 다행히 친구는 원기를 회복했고 지금은 건강한 모습으로 목회를 하고 있다. 지금도 만날때면 “내가 기도해서 너를 살렸다”고 너스레를 떤다. 친구도 수긍해 주며 고마워한다.
장애인 사역을 하며 항상 들어오는 마음은 ‘조금은 쉬고 싶다’였다. 앞만보고 달리다보니 지쳐가는 내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팬데믹이 몰아치며 진짜 푹 쉬는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장애아동을 둔 가정은 안팎으로 고난이 심하다. 널싱홈에 장애인들은 창살없는 감옥신세가 되었다. 한가지 알아차린 것은 바빠도, 한가해도 시간의 흐름은 한결같다는 것이요. 일할 수 있는 것이 은총이요, 분주함 속에 쉼이 진정한 쉼임을 깨닫는다. 바쁘고 힘들어도 사람을 만나고 역동적으로 사역을 하는 것이 축복임을 절감하며 살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세가지 시제(tense) 속에 산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다. 희한한 것은 어제와 오늘은 순수한 한글인 반면 내일(來日)은 한문이다. 그러니까 순수한 한글로는 미래를 나타내는 단어가 없다. 어제는 이미 흘러간 시간이다.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은 어제에 대한 미련이 별로 없다. 그들에게는 내일이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든다. 나이가 들어가면 자꾸 어제를 돌아보게 된다. 반추(反芻)라는 단어는 그래서 생겨난 것 같다. 추억, 회고- 정감있게 다가온다. 모두는 오늘을 살고 있다. 그런데 실상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자꾸 과거의 상처를 곰 씹으며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을 살아야 한다. 지금 주어진 시간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소망을 가지는 이유는 내일이 있기 때문이다. 수십년 전의 나를 돌아보라! 오늘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 것을 상상이나 했는가? 어제가 어떠했든, 오늘 힘든 일이 나를 짓눌러도 내일이 있기에 사람들은 소망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왜? 다 지나가기 때문이다. 브라이언 다이슨은 말했다.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수수께끼이고, 오늘은 선물이다” 어제는 바꿀 수가 없다. 따라서 해석을 잘해야 한다. 내일은 일단 살아있어야 맞이할 수 있는 신비의 순간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현재(present)를 “present”(선물)로 살아야 한다. 오늘은 신비의 날이고 가능성의 시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