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종착역

by 관리자 posted Feb 2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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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아가가 울며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삶 자체가 고난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감지했기 때문이리라. 고난이 없는 인생은 없다. 날마다 크고작은 고난을 감내하며 인생이야기는 흘러가고 있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는 보배를 보배로 깨닫지 못한다. 서양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 “No Cross is No Crown”<십자가 없이 면류관 없다> 참 위대한 말이다. 고난과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는 결코 영광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나에게는 별난 취미가 있다. 방송국 연말시상식을 빼놓지 않고 시청하는 것이다. 시상식에 하이라이트는 역시 대상(大賞)이다. 능숙한 사회자의 조율로 긴장에 긴장을 거듭하다가 수상자가 발표된다. 드디어 이름이 불려지는 순간, 당사자는 당황하며 환희하는 얼굴이 잡히고 시상대에 오른다. 트로피를 받아들고, 소감을 말할 때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 말을 이어간다. 그 장면을 보며 함께 운다. 전혀 아는 사이도 아닌데 수상자와 한마음이 되어 함께 울며 축하 해 준다. 그 자리에 오기까지에 시간과 노력, 아픔이 전해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 그 순간, 아무 감정 없이 상을 받고 수상 소감을 말하는 사람을 보면 얄밉기까지하다. 그때 느끼는 것은 두 가지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냉혈인간이거나, 편법으로 상을 타게 되었거나그럴리는 없겠지만 고통의 시간을 통과했다면 영광의 순간에는 감격의 눈물이 저절로 흐르게 되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마다 갖가지 해결책을 추구 해왔다. 힌두교에서는 갈마리라는 교리를 사용하여 전생의 죄 값대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교리로 사람들을 비참하게 구속한다. 불교에서는 열반의 교리를 가르친다. 열반(涅槃)촛불을 끄듯이 꺼진다는 뜻으로 욕망을 완전히 종식시키면 인간의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고 한다. 마치 스탠리 존스가 표현한 것처럼 두통을 없애기 위해서 머리를 자르는 것과 같은 형식이다.

 

  회교는 고난을 알라신이 정해준 철저한 운명론으로 가르친다. “한번 네가 고난을 당하면 빠져나오지 못하므로 굴복하는 것만이 너의 의무이다. 이 너를 그렇게 만들어 주셨으니 불평하지 말고 그대로 받으라는 것이 힌두교 교리이다. 소위 인쉬 알라!”이다. 이런 종교의 교리를 보며 깨닫는 것은 사람이 아무리 고난의 문제를 풀려고 아우성을 치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난은 그렇게 무지막지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고난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야 한다.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는다. 고난의 종착역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 하나님은 고난을 가지고 인생을 다루신다는 것을 맹백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고난이 왔을 때 고난 자체를 보기보다 그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고난을 당할 때에 고통은 당사자만이 알 뿐이다. 그 초라한, 비참함, 외로움, 가슴이 찢어지는듯한 고통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묘한 것은 그 아픔 한가운데 하나님은 서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난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기적을 체험한다. 고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한다. 고난은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그러므로 고난의 종착역은 환희와 축복이다. 따라서 고난은 축복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형벌과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을 당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은 부활의 영광으로 반전되고야 만다.

 

  고난 당하는 것은 불행처럼 보이지만 그런 고통을 통해 그분과 가슴으로 만날 수만 있다면 결국 그 고난으로 인하여 상상을 초월하는 축복역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