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는 시련이 있다. 하지만 극한 장애가 찾아온다면 견뎌낼 사람이 있을까? 그것도 온몸이 마비되는 경우에 말이다. 그런데 그런 드라마에나 나올듯한 상황을 역전시켜 당당히 살아가는 주인공이 있다. 이규환 교수. 그는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치과 진료를 하는 현직 의사이다. 원래 체격 좋고 공부도 잘해서 남 부러울 게 없었던 청년이었다. 그런데 그만 2002년 다이빙을 하다가 목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한다. “오지게 다쳤네.” 병원에 실려 온 이규환을 본 의사의 첫 마디였다. 결국 그 사고로 신경, 운동 기능과 관련된 5번, 6번 경수 손상으로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치대 본과 3학년 시절이다.
키 188cm에 운동을 좋아하던 그는 하루아침에 전동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깨어나 보니 중환자실이었습니다. 아직도 그때를 잊지 못합니다.” 얼굴 아래는 물론 손가락마저 감각이 없는 것을 깨달으며, 그는 깊은 암흑 속에 들어간다. 이규환은 의사에게 수면제를 달라고 했다. “‘이게 꿈이라고,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자보았는데 현실이더라구요. 원망이 나오기 시작하더군요. 하늘에 욕도 하고 나 좀 죽여달라”고 했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하였다.
중환자실에서의 악몽을 이규환은 생생히 기억한다. “매일 매일 고통의 공간이었습니다. 사람은 죽어 나가고 비명이 들리는 공간이었습니다. 책을 읽어야만 그 상황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덕분에 당시 병원에서 100권 정도를 읽었다고 한다. 모두 “포기하라”고 했지만 그는 수술 1년 만에 다시 학교로 복학했다. 하루 대부분을 앉거나 누워서 보내야하는 전신마비 장애인들은 피부 욕창 등이 자주 발생될 수 있다. 그 역시도 욕창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자신의 몸에 욕창이 생긴 줄도 모르고 공부에 열중하였다. 엄청난 고통과 심적 부담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동기, 후배들의 도움과 격려로 견뎌낼 수 있었다. 끝없는 노력 끝에 결국 이규환은 세계 최초의 중증 장애인 치과의사가 되었다.
의사가 되었다고 끝이 아니었다. 예민한 기술이 필요한 치과 진료는 새로운 도전을 필요로 하였다. 그는 자신의 팔에 끼워 쓸 수 있는 특수도구를 개발했다. 전담 위생사의 도움을 받아 드디어 병원을 개업했다. 개업하여 마주친 첫 환자는 휠체어에 앉은 그를 보자마자 “병신에게 진료받기 싫다”는 막말을 내뱉고 돌아섰다. 그가 보는 앞에서 침을 뱉고 나가는 환자도 있었다. 같은 돈을 내고 치료를 받는 것이니 모든 상황을 감내해야만 하였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너무도 가혹한 현실이었다. 10명이 방문하면 7명은 진료를 받지 않고 그냥 돌아갔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의사는 30분이면 끝내는 스케일링도 이 씨는 1시간 넘게 걸렸다. 그러나 그는 환자에게 “시간이 두 배 걸리는 대신 제가 세계에서 가장 꼼꼼하게 해 드릴 께요”라며 온 정성을 다했다. 그의 진심과 실력은 통했고 하나둘 환자가 늘어갔다. 지금은 분당서울대병원 건강증진센터에서 검사, 상담, 판독, 예방 클리닉을 담당하는 교수로 일하고 있다. 이 교수는 “장애인도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비장애인보다 10배의 노력을 할 각오만 있으면 말입니다.”고 다부지게 말한다. 이런 대단한 일들을 감당해 낸 그이지만 “항상 부모에게는 평생 불효자”라고 되뇌인다. 그가 다쳤을때에 부모는 실신하다시피 했지만 다시 일어서려는 그를 누구보다 응원해 주었다.
이규환 교수는 “하늘이 자신에게 이런 길을 가도록 만든 뜻이 있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장애를 가지게 되면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며, 그는 자신이 가진 재능을 바탕으로 의료봉사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필라밀알선교단에도 4분의 전신마비 장애인이 있었다. 그들을 처음 만났을때에 전이되어오는 아픔 때문에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같은 장애인으로서의 동병상련이었다. 극한 장애를 이겨내고 가장 예민한 감각이 필요한 치과의사로 살아가는 이규환 교수를 그래서 더욱 존경하고 귀하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