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 뙤약볕이 따갑다. 목이 말라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 마시다가 문득 어린 시절에 추억이 떠올랐다. 나는 초등학교 때 시골에서 살았다. 날씨가 더워지면 냇가로 멱(수영)을 감으러 가서 더위를 식혔다. 배가 고프면 주로 감자나 옥수수를 먹었다. 무더운 여름 나절에 동네를 술렁이게 하는 부류가 있다. 바로 “아이스케키 장사”이다. 그 시절에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는 아이들은 거의 우리 또래였다. 아이스케키 통을 들고 나타나 “아이스끼∼게 얼음과자!”라고 외치고 다녔다. ‘아이스케키’를 왜 그렇게 발음을 했는지 모르지만 짐작하기는 영어에 대한 관념이 없고 좀 더 자극을 주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보채는 아이의 성화를 못이겨 엄마가 “여기 아이스케키 주세요!” 소리를 치면 아이는 무거운 아이스케키 통을 메고 달려왔다. 파란 통에 뚜껑을 열어젖히면 아이스케키가 가지런히 누워있었다.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는 아이들은 항상 자루를 들고 다녀야 했다. 현찰보다는 병을 들고 나와 케키를 사는 집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통에 아이스케키가 팔려 나갈수록 자루에는 병이 많아져 점점 무거워졌고 어린 나이에 그들은 중노동을 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당시 아이스케키는 맹물에다 팥을 삶아 찧어 만든 팥물과 달보드래한 맛이 나도록 사카린 또는 설탕을 섞어 틀에 넣고 손잡이용 막대기를 꽂아 얼려 만들었다. 생김새는 대부분 끝으로 갈수록 둥근 전봇대 형으로 팥고물이 가라앉은 탓에 붉은 팥 색깔을 띠는 끝부분이 특이 맛이 좋았고, 붉은 손잡이 부분으로 올수록 단맛이 덜하였다. 아이스케키 통은 나무판자를 이용하여 사각형으로 짠 다음 통 전체를 시원하고 깊은 물을 의미하는 파란색 페인트를 칠하였다. 통 양옆에는 무지개처럼 타원형 흰 글씨로 ‘아이스케키’, 또는 ‘얼음과자’란 글씨를 찍고 가운데는 한자로 얼음 빙(氷)자를 둥근 테를 넣어 새겼다. 케키통은 두 가지 형태로 메고 다니면서 팔 수 있도록 미군용 군용벨트를 잘라 만들어 붙인 멜빵끈이 달린 소형과 짐바리 자전거에 싣고 다니면서 팔 수 있는 대형 통이었다.
더운 날 아이스케키는 안 팔리고 짜증이 나면 장사하는 아이는 느티나무 아래에 케키 통을 깔고 앉아 아이스케키를 꺼내먹었다. 그 모습이 참 부러웠다. 난 그때 그 아이스케키를 그 친구가 마음대로 꺼내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더운 여름날에 아이스케키는 우리들에게 최고의 묘약이었다. 보채는 아이와 그 아이를 진정시키려는 엄마 사이에 볼만한 승강이가 벌어진다. 아이스케키 장사 옆에는 아이들이 몰려나와 북적대고 어머니들은 고쟁이 옆에 매단 주머니를 꺼내 고이 아껴 두었던 동전을 꺼내 아이스케키를 사서 입으로 한번 ‘쓱’ 핥아본 뒤 아이의 손에 들려준다. 돈이 없으면 빈병, 헌 고무신, 구멍 난 양은 솥 또는 머리칼을 주고 아이스케키와 바꾸어 사주기도 하였다.
아이스케키를 받아든 아이들의 모습이 가관이다. 요즈음 아이들처럼 한입씩 베어 맛있게 양껏 먹는 것과 달리 빨리 먹는게 아까워 혀를 ‘낼름’거리며 핥아먹거나 입에 넣어 한 번씩 ‘쪽’ 빨아먹는 식으로 아껴가며 먹었다. 다른 아이들은 아이스케키를 입에 문 아이 곁에 서서 부러움과 제발 한입만 주었으면 하는 애원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며 따라다녔다. 이때 마음이 약하거나 착한 아이들은 한 번씩 빨아 볼 수 있도록 건네주어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다. 지금 아이들이 보면 ‘욱’하고 구역질을 할 장면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우정을 나누며 성장하였다. 아무 탈도 없이 말이다.
그 후 「삼일빙과」라는 이름의 고급(?) 아이스크림이 등장하였다. 나중에는 “하드”로 발전한다. 산업이 발달하며 사라진 것이 “아이스케키 장사”이다. 다양한 모양과 이름의 아이스크림이 TV 화면을 현란하게 장식하면서 “아이스케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더운 여름날, 아이스케키를 입에 물면 부러운 것이 없었던 그때에 비해 모든 것이 풍족해지기는 하였지만 오히려 가슴 한켠이 채워지지 않는 것 같아 아쉽다. 저만치 느티나무 아래로 케키 통을 짊어지고 “아니스케키”를 외쳐대던 악동들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