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

by 관리자 posted Sep 1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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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차의 문제가 생겨 공장에 맡기고 2주 동안이나 답답한 시간을 지내야만 하였다.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친구 목사의 전화였다. “내가 데리러 갈테니까 커피를 마시자는 내용이었다. 친구의 차를 타고 커피숍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대화는 진지와 웃음을 오가며 길게 이어졌다. 헤어지는 시간이 가까워지며 그냥 가, 난 걸어갈게” “아니 불편한 몸으로 멀텐데” “요사이 운동도 못하고 걷고 싶네완강한 내 태도에 친구는 이내 가버리고 나는 걷기 시작했다. 무더운 날씨 탓에 얼마 안되어 온몸은 땀범벅이 되었다. 차를 운전하며 오고가던 길은 막상 걸어보니 끝이 보이질 않았다. 이미 늦었다. 걸어야 했다. 차로 7분이면 되는 거리를 무려 꼬박 1시간 40분이 걸려 집에 당도했다.

 

  샤워를 하며 기분은 좋았다. 운동 후에 느껴지는 청량함과 좀처럼 걷지 않는 내가 2마일이 넘는 거리를 걸었다는 성취감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빠르게 달리는 차로 깨닫지 못하던 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인도를 따라 걷는 여유, 스쳐가는 나무들의 자태, 나비, , 각종 벌레들의 날개짓, 신호등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 ‘집 근처에 이런 곳이 있었구나!’하는 새삼스러움, 가지런히 서 있는 집들의 다양함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한편, ‘다리가 튼튼하면 매일 이렇게 걸을 수 있을텐데하는 아쉬움도 밀려왔다.

 

  속도와 감성은 반비례한다. 일단 속도가 느려야 생각을 많이 할 수 있고 깊고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달리는 차보다는 자전거가, 그런 이동 수단보다 걷는 단계에서 사람은 저 바닥에 가라앉아있는 감성을 경험하게 된다. 바야흐로 스피드 시대이다. 일단 빨라야 한다. 자동차도, 인터넷도, 금융처리도 빨라야 좋아하는 세태이다. 식당에 가서도 음식이 빨리 안 나오면 짜증을 낸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빨리빨리민족이다. 덕분에 유럽에서 500년이 걸린 과정을 우리 민족은 단 50년 만에 이룩해냈다. 위대해 보인다. 하지만 그 빠른 세월이 가져다주는 후유증은 감내하기 힘든 과정으로 부딪쳐오고 있다.

 

  어린 시절, 구하기 힘든 만화책을 받아들면 아이들은 즉석에서 읽어갔다. 하지만 나는 항상 집에 들어가 방에 배를 깔고 천천히 음미하며 읽었다. 읽다가 내용이 이해가 안 되면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읽었다. 고교 시절부터 정류장에서 버스를 탈때에 서둘러 오른 적이 거의 없다. 급박스럽게 내가 탈 버스가 당도하면 일단 보내고 천천히 다음 차를 기다렸다. 나는 밥도 아주 천천히 먹는다. 편한 사이는 대화를 많이 하기에 그 속도는 더 느리다. 그래서 나는 맛이 없는 것이 거의 없다. 감성적인 사람들의 특성이다.

 

 그럼 성격이 차분할까? 아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급한지 잘 안다. 하지만 속도감을 줄여야 할 때는 무섭도록 조절을 하려 애를 쓴다. 인생을 살아보니 급해서 좋은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우리 세대는 느린 것에 이골이 났다. 전기가 없어 호롱불로 어둠을 밝히고, 자동차도 드물어 주로 걸어 다니거나 소달구지를 의지하고, 자전거가 나오며 조금 속도가 났다. 수도는 상상도 못하고 주로 우물물과 펌프로 식수를 해결했다. 밥을 하려면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했기에 뜸을 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였다.

 

 하지만 그때는 다들 행복해 했다. 다들 그렇게 살았기에 비교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었고, 그래서 서로를 도와주며 삶의 이야기를 써나갔다. 그때에 비하면 모든 것이 편리해지고 놀랄 정도로 모든 것이 빨라졌다. 손에 든 핸드폰으로 못하는 것이 없다. 어느곳에서나 원격조정을 하면 모든 것이 가동되는 세상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점점 곤고해하고 행복지수는 점점 떨어지고 있다. 속도와 행복은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하며 살고 있다.

 

  나무에는 다 나이테가 있다. 세포 분열 속도가 달라 영양이 풍부한 여름에는 많이 자라고 겨울이 오면 성장이 더뎌지며 동심원 모양의 테를 갖게 된다. 나이테를 보며 놀라는 것은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이다. 느리다고 해서 자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빨리빨리천천히의 균형을 잘 맞추는 사람이 인생을 진정으로 음미할 줄 아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