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2022년의 끝자락이다. 3년의 길고 지루했던 팬데믹을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 금년 세모는 서러운 생각은 별로 안드는 것 같다. 돌아보니 금년에도 바쁘게 돌아쳤다. 1월 새해 사역을 시작하려니 오미크론이 번지며 점점 연기되어 갔다. 2월부터 본격적인 밀알사역을 시작하였고, 2월에는 L.A.에서 개최된 <미주밀알단장컨퍼런스>를 이끌었다. 회의가 마무리되자마자 과테말라로 향하였고, 진정 비몽사몽간에 일정을 감당해야 했다. 입국 전 · 후에 받아야 하는 PCR 검사가 정신을 흐트렸고, 치안이 불안전한 과테말라 한복판에서 <과테말라 밀알선교단>을 설립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곳에도 장애인들은 많았다. 어린아이로부터 청년들까지. 특히 총상을 입어 장애인이 된 몇몇분을 보며 가슴이 아려왔다.
5월에는 집회 인도와 아울러 한국밀알 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였다. 서울을 30년 살다 이민을 왔는데도 가보면 여전히 낯설다. 이제는 영원한 이방인임을 실감한다. 조금 여가가 날 때면 10대의 추억을 찾아 둘러보지만 이미 파헤쳐져 전혀 다른 동리가 되어있었고, 흑석동 언덕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며 어린 가슴을 달래던 소나무 숲은 이미 아파트가 즐비하게 들어서서 자취조차 찾기가 힘들어졌다. 우리 가족이 처음 상경하여 둥지를 틀던 청량리는 이제 맨하탄을 연상케하는 고층빌딩이 들어서며 내 추억을 희석시켜 버렸다. 중화동 다리를 건너면 빼곡히 눈에 들어오던 망우리 공동묘지는 이제 도시화 되어 금싸라기 땅이 된지 오래이다. 왜 한국은 그렇게 깔아 엎는 것을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간다.
지난 일년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을까? 아니 이제까지 살아오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살아왔을까? 목사가 되어 40대에 마주 친 중학교 동창이 나와 그렇게 친했다는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추억이 생각나지 않아 겸연쩍었던 때가 있었다. 기억력이 좋은 내가 왜 그것을 다 지워버렸을까? 나는 유독 많은 곳을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내가 가장 오래 살고 있는 곳이 필라델피아라면 놀랄 것이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경기도에서 다녔다. 고등학교를 서울로 진학하면서 대학, 대학원 공부를 했다. 그리고 목회를 하며 세계를 다니고 사람들을 만났다. 어쩌다 생각나는 사람도 있고, 까맣게 잊혀진 사람도 많다.
한가지 깨닫는 것은 “내 인생을 스쳐 지나간 모든 사람들 속에는 내 모습이 있다”는 사실이다. 나와 비슷한 사람, 통하는 사람과 교제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전혀 다른 삶의 패턴을 가진 사람과 부대끼며 인생을 엮어왔다. 스치듯 지나간 사람이나 지금까지 수십년 인연을 이어오는 그 사람들 속에 내 모습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한다. 왜 나는 그 사람이 그렇게 좋았을까? 나와 비슷해서, 취향이 같아서, 성격이 닮아서? 왜 나는 그 사람이 그렇게 싫었을까? 나와 너무 똑같아서? 아니면 너무 달라서? 나를 무시해서, 성가시게 해서, 너무 집착을 해서? 돌아보면 두가지 양상인 것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기나긴 세월을 살아가며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어 오랜 날 이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금방 끊기도 한다. 상처를 주고받는 인연, 내 인생을 견고하도록 기초를 세워주는 인연, 사랑을 느끼게 하고 살맛나게 하는 인연등, 그 모습은 다양하다. 그 당시에는 미워하고 원망하기도 하지만 돌아보면 결국 나 자신의 마음이나 행동으로 결과를 낳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음속에 어둡거나 숨기고자 한 것이 그득하다면 언제고 진실은 드러나고야 말 것이다. 반면 마음이 밝거나 따뜻함이 가득한 사람은 말과 모습에서 따스함이 우러나와 상대를 저절로 사랑으로 이끌게 된다.
지금까지 많은 인연속에 내가 성숙해 왔다면 앞으로도 다양한 사람을 만나 인연을 이어갈 것이다. 똑같은 인연은 하나도 없다.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지금도 여전히 머무는 인연이 있다. 딱히 왜 좋은지 당시는 알 수 없지만 어렴풋이 느낌은 말할 수 있다. 행복의 비결은 이것이다. 말로 표현은 안되지만 마주 앉으면 마냥 좋고 행복한 인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