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 간 그 겨울

by 관리자 posted Jan 2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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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 날씨는 음력이 정확하게 이끌어 주는 것 같다. (22)을 넘어 입춘(24)이 한주 앞으로 바싹 다가서고 있다. 불안한 것은 눈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별걱정을 다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겨울이 겨울답지 않은 것이 마음 한켠에 아쉬움을 준다. 계절은 계절에 걸맞는 온도와 풍경이 있는 법인데 말이다. 겨울은 차갑고 색깔은 흰색이어야 하는 것 아닐까? 누군가가 어떤 계절이 좋으냐?”고 물어온다면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다. 계절마다 특징이 있고 매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때 겨울이 좋을때가 있었다. 우선 내뱉는 입김의 자취가 좋았고, 매섭지만 얼굴을 스치는 찬 바람의 애무가 정겨워서였다. 차가운 기운이 젊은 날의 아픔을 감추어줄 것 같아 겨울이 고마웠다.

 

  양희은의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중에 가랑비야 내 얼굴을 거세게 때려다오 슬픈 내 눈물이 감춰질 수 있도록.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음~”하는 가사가 있다. 넘 아파서 눈물이 흐를 때 소낙비를 홈빡 맞으며 걸어본 경험이 있는가? 젊은 날의 초상은 겨울의 찬바람과 더불어 묘한 위로를 받았다. 그냥 내가 싫었다. 항상 기우뚱거리며 걷는 것, 병들어 안방 아랫목에 누워 투병하고 있는 아버지, 모든 면에서 밝은 빛은 전혀 새어 들어 올 가망성이 없는 내 삶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렇게 외친다. “20대가 그립기는 하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돌아보면 손에 잡힐듯한데 일찍이 하늘로 떠난 아버지의 나이를 넘어선 지 오래이다. 그래서 나를 항상 응원해 주던 그분의 체취가 그립다. 불어오는 찬바람을 핑계 삼아 실눈을 떠본다. 왜 이리 세월은 빨리 흐르는지? 속절없이 추억은 멀어져만 가는지? 그 해 그 겨울. 아스팔트에 뒹굴던 마로니에 잎의 잔영이 내 가슴에 남아있다. 길거리 전파상에서 울려 퍼지는 감미로운 음악에 발걸음을 멈추고 군밤과 호빵 냄새를 맡으며 다가올 봄의 따스함을 기대했다. 여기는 미국. 오랜 세월을 그렇게 해가 바뀌고 새롭게 다가오는 겨울 냄새를 맡으며 살고 있다.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다. 시작을 찾아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느덧 마음이 넉넉해진다. 사는 것이 힘겹고 되알지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시작할 때를 더듬어보면 살며시 미소가 올라온다. 나는 계절을 냄새로 느낀다. 겨울은 무취라서 좋다. 차갑지만 정신을 맑게 해 주어 싱그럽다. 밤새 눈이 와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마당을 지나 초막 속에 고이 묻어놓은 장독 뚜껑을 열어 새빨간 김장 김치를 꺼내는 엄마의 머리 수건이 정겨웠다. 별 양념없이 담근 동치미의 시원한 맛이 겨울과 어우러져 나를 부자로 만들었다. 화로에 구워 먹는 고구마, 감자, 옥수수. 그리고 차가운 다락에서 꺼내와 먹던 다식과 밥풀강정, 단단한 엿이 겨울 밤의 대화를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눈이 펑펑 오는 날이었다. 기다리던 버스는 한참을 오지 않았고, 하늘하늘 떨어지는 해파리 같은 눈송이들이 촘촘히 쌓여가고 있는 버스 정류장에는 그리 많지 않은 승객들이 빼꼼이 고개를 내어밀며 집에 데려다줄 버스를 기다렸다. 추었지만 춥지 않았던 이유는 그 시절에는 이웃간의 끈끈한 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해가 되었지만 쏟아지는 뉴스는 희망보다는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고통을 예고하고 있다. 고정희 시인의 피맺힌 시, ‘야훼전상서가 떠오른다. “신도보다 잘사는 목회자를 용서하시고, 사회보다 잘 사는 교회를 용서하시고, 제자보다 잘사는 학자를 용서하시고, 독자보다 배부른 시인을 용서하시고, 백성보다 살쪄 있는 지배자를 용서하소서!” 잘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모순덩어리인 사회의 경종을 울리는 듯 하다.

 

  겨울이 깊을수록 봄은 가까워 온다. 고통이 심할수록 평안의 따스한 손길은 다가오고 있다.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 추위를 견딘만큼 봄을 맞이하는 환희는 배가 되기 때문이다. 바람이 드셀수록 산천초목은 강인하게 버티며 봄을 봄답게 맞이할 수 있다. 모두의 겨울이 부디 춥고 외롭지 않기를. 서로의 쓸쓸한 어깨에 따스한 목도리를 둘러 줄 수 있는 그런 겨울이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