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던 시대에 나는 자라났다. 학기 초 학교에서 내어준 가정환경조사서의 호주 난에는 당연히 아버지의 이름 석자가 자리했다. 간혹 엄마의 목소리가 담을 넘는 집도 있었지만 그때는 대부분 아버지가 가정의 모든 의사결정을 주도하였다. 아버지로서 능력을 발휘하며 가정을 이끄는 모습도 있었지만 생활력도, 모범도 보이지 못하면서 강압적인 부권을 행사함에도 다들 ‘그러려니’ 하며 그분을 중심으로 가정이 꾸려져갔다. 하기에 어른은 무조건 존경해야하고 실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의식으로 스승을 임금이나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예우하며 성장하였다.
교복을 입고 다니던 시절에도 어른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줄 알고 도를 넘지 않는 태도를 취하며 살았다. 하지만 근대화시대가 열리고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세상이 변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이런 질서는 안개처럼 날아가 버린지 오래다. 요사이 아이들의 체격은 나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양호하다. 따라서 사고를 치는 나이가 점점 하향화되어 감에도 소위 촉법 소년(14세 미만의 청소년은 형벌을 받지 않는다)의 위력은 공감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담뱃불을 끄라!”며 나무라는 엄마 나이의 여인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일부터, 차를 절도하여 몰고다니다 사고를 내는 일들이 비일비재해지며 눈꼴사나운 일을 보아도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인 것처럼 포장되어 지는 세상이다.
언론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국가지도자를 향한 거친 언사는 결국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과거에는 가정마다 자녀들이 그득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때이기에 부모들은 오로지 부양에만 매어달려야 했다. 학교 선생님에게 교육을 맡기고 조금 엄한 태도로 훈육을 해도 그냥 용납했다. 이후 핵가족 시대가 열리면서 자녀는 곧, 부모라는 공식이 탄생한다. 귀하다보니 누구라도 자식을 건드리면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학교에서 교사가 내 아이를 심하게 다룬다는 느낌이 오면 물불 안가리고 덤벼드는 세태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인권이라는 명목하에 절대적 교권이 무너진지 오래이다. 선생님을 감히 “쌤”이라고 줄여부르며 친근감을 나타내는 선을 넘어 오히려 교사가 학생의 눈치를 보는 시대가 되었다.
세상이 꾸중하는 어른이 없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요즘은 아이들의 천국이다. 부모들은 빚을 내서라도 유명 업체 옷차림에 값비싼 전자 제품으로 아이들 입맛을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 학교 현장에서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누워 자도 깨우지를 못하고, 사회적 문제를 일으켜도 꾸중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거기에 국방의 의무를 감당해야 할 군인들조차 “훈련이 고되다” “식단의 질이 떨어진다”고 국민청원 게시판에 민원을 올린다. 군영에서 스마트폰 사용이 가능하여 수시로 가족이나 친구들과 연락이 가능한데다가, 계급을 떠나 선임 병사를 ‘아저씨’라고 부른다고 하니 가장 엄격해야 할 군기도 흔들리고 있다.
진정 세대가 어긋나고 있음에도 따끔하게 나무라는 어른을 찾아보기 힘들다. 소위 MZ 세대를 이해해 주고 비위를 챙기고,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못 본 척하거나 장단을 맞추는 모습을 현명한 처세술이라고 한다. 괜히 젊은이들에게 훈계 투 말을 할라치면 “꼰대질 한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보아도 못본 척, 알아도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이 가장 어른스러운 행동처럼 되어 버렸다.
돌아보자. 초등학교에서 대학원까지 무려 19년 동안 교육을 받으면서 진심으로 존경할 만한 스승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교사(교수)도 있었다. 하지만 철저한 행동의 원칙이 있었기에 내 삶에 약이 된 듯하다. 경우에 어긋나는 태도에 나무람과 체벌이 주어졌기에 반듯하게 인생을 살 수 있었다. 집에는 부모가 있었고, 학교에는 선생님이 있었고, 마을에는 동네 어른이 있었다. 어른이 없기에 정치도, 사회도, 가정도 혼잡스러워만 간다. 결정적으로 질서를 잡아줄 어른이 없다.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넉넉해지는 어른이 사무치게 갈급한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