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종(양평)에서 나는 3년동안 초등학교를 다녔다. 지제, 강상, 양평초등학교를 거쳐 아버지의 인사이동을 따라 산골 깊이 서종초등학교로 전학을 해야 했다. 지금은 카페촌이 들어서고 골짜기마다 분위기 좋은 별장이 즐비한 곳이 되었지만 당시는 촌(村)이었다. 이왕이면 학교가 가까운 곳에 집을 마련하면 좋으련만 아버지는 항상 지소 근처로 정하셨다. 서종은 문호리가 주를 이루는데 상, 하로 나뉜다. 우리 집은 상문호리(무내미)에, 학교는 하문호리에 있었다. 부실한 다리로 등하교를 하는 것은 어린 나에게 고된 일이었다. 집을 나서 오솔길을 걷다가 한길로 접어들고, 교회가 자리한 산등성이를 돌아 한참을 걷다보면 학교 정문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나 익숙한 시골학교의 정경이 펼쳐졌다. 정문을 통과하여 운동장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철봉대, 평행봉, 그네등 놀이터가 자리하고 저만치 중앙에 교무실과 교실이 가지런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서종초등학교가 아름다운 것은 북한강변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겨울은 강바람 때문에 몹시도 춥고 괴롭지만 봄, 여름, 가을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수업을 하다가 창을 내다보면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강을 건너가는 나룻배와 파아란 강과 하늘이 조화를 이루며 정겹게 다가왔다. 건너편이 마석이었으니까 아마 5일 장을 보러 가는 행렬인듯했다.
우리 동네는 뒷산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옹기종기 집들이 자리하며 앞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상상력을 키워준 곳은 자그마한 도랑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 우기에는 도랑물이 차올라 찰랑거렸고 봄에는 올챙이들이 알에서 깨어나는 모양을 볼수있었다. 여름에는 송사리 떼의 향연이 눈길을 끌었다. 옆집은 재관이네 집이었고 도랑을 저만치 두고 중간에 우물이 자리했다. 그때 우물은 아낙네들의 빨래터였고, 스트레스 해소장이었으며 동네 소식이 오가는 근원지였다. 우물은 동네 길목에 자리하였기에 오가는 모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눔과 동시에 사람들의 동태가 파악되는 지점이었다.
도랑은 개구쟁이들의 풍성한 놀이터였다. 장마가 지나면 고기를 잡는다고 저마다 족대를 들고나와 도랑 풀숲을 뒤졌다. 제법 수입이 좋았다. 미꾸라지와 붕어가 주를 이루었지만 때로는 피라미와 제법 큰 고기들이 잡히며 모두의 탄성을 자아냈다. 아마 강에서 고기들이 물결에 밀려 상류로 헤엄을 쳐서 올라온 모양이었다. 무더운 여름. 선풍기도 없던 시절.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열대야에는 숨이 턱턱 막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때 도랑은 우리에게 피난처였다. 전기도 없던 시절이라 알몸으로 도랑에 뛰어들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킥킥’거리며 도랑에서 몸을 식히고 우물물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하면 꿀잠을 잘 수 있었다.
가끔 걸터앉아 도랑을 들여다보면 온갖 광경이 물속에 투영되었다. 오가는 물고기들, 개구리들의 귀여운 헤엄질, 물방개와 풍뎅이, 소금쟁이의 신기한 몸짓, 그리고 거울처럼 비추어지는 하늘과 구름의 향연, 곁에 선 대추나무의 자태까지 그렇게 모든 것들이 어우러지며 한여름의 향연은 절정을 이루었다. 어린 가슴에 차곡차곡 모든 것이 채워져 갔고 이제 그 소중한 추억을 조금씩 들추어내며 글을 쓰고 있다. 도랑을 거슬러 시냇물을 지나쳐 올라가면 정배리 뚝방이 나타나는데 자그마한 저수지처럼 물이 고여있었다. 물론 천수답을 하던 당시 논과 밭에 비상시 물을 공급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수영을 제법 할 줄 아는 우리에게는 노천 수영장이었다.
20대 초반 여름. 추억이 그리워 서종을 찾았다. 힘겹게 건너던 다리, 시냇물은 왜 그리 작아보이던지? 크게만 보이던 초등학교는 실로 손바닥만 했다. 어렸기에 커보였던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도랑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민물 매운탕이 먹고 싶어 그때 사귀었던 친구들과 도랑을 뒤지며 밤고기를 잡다가 ‘대행’이가 뱀에 물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날 병원을 찾았을 때 대행의 다리는 두배로 부풀어 올라 있었다. 미안하기도하고 기가막혀 서로를 바라보며 웃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자그마한 도랑은 어린 나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안겨준 원천이었다. 다리에 앉아 도랑에 발을 담그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엮어내던 그 시절로 단 한번만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