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짐승이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만이 웃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개나 고양이는 웃지 못한다. 사람만이 다양한 소리를 내며 웃을 수 있다. 하기에 웃음을 “만국공통어”라고 한다. 웃음소리만 들어서는 한국인인지 외국인인지 구분이 안간다. “톤”(tone)은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세계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다양하면서도 거의 같다. 웃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인상을 쓰고 분위기를 심각하게 몰아가는 사람보다는 환한 얼굴로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어 가는 사람이 인기가 좋다. 왜냐하면 사는 것 자체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부흥사 故 “신현균 목사님”은 재미있는 설교의 대가였다. 성대모사를 얼마나 잘하시는지 “새, 탱크, 헬기, 비행기, 속사포 소리”까지 코메디언 이상으로 흉내를 잘 내셨다. 에너지가 넘쳐서 강단을 양쪽으로 뛰어다니며 말씀을 전했다. 가난하고 힘든 시절에 신 목사님의 설교는 성도들에게 위로와 웃음을 주었고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었다. 혹자는 “내용도 없이 웃기기만 하고 그게 코메디이지, 설교인가?”하며 그분의 부흥회 스타일을 비하하기도 하였다. 하기야 ‘조금은 지나치다’ 싶은 때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자리에서 신 목사님이 하신 말씀에 공감했다. “사람이 처음 만나면 분위기가 어색합니다. 그때 웃음은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고 말씀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역할을 합니다.”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웃음’에 대해 매우 인색하다. 미국인들은 마주치면 웃는다. 오해할 정도로 환한 미소를 전해온다. 한국에 가서 느끼는 것은 미소나 친절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유교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서일까? 내가 결혼을 할때만해도 신부는 절대 웃을 수 없었다. “웃으면 딸을 낳는다”나? 어쩌다 결혼식 사진을 보면 아내의 경직된 표정을 본다. 요사이 결혼식을 보라! 신부가 웃는 것은 기본이고 신부 입장을 할때에 손을 흔들며 소리까지 친다. 옛 조상들이 보았으면 뒤로 넘어갈 모습이다.
한국의 통상적인 교육의 흐름은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고 표정관리를 잘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시대의 흐름이 바뀌었다. 솔직하고 감정표현을 잘하는 사람이 세상을 이끌어 가고 있다. 대통령의 조크 한마디가 국민들을 웃게 하고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바야흐로 웃음이 모든 분야에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지인이 “간암”에 걸렸다. 워낙 건강하던 분이 ‘중병에 걸렸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갔다. 찾아가
보니 얼굴은 새카맣고 야윌대로 야위어 있었다. 참 안스러웠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생식요법을 통해 애를 쓰더니 암을 이기고 일어섰다. 물론 기도의 힘이요,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고 싶다. 회복소식을 듣고 심방을 갔다. 이야기 중에 “이 목사님, 많이 웃으세요. 많이 웃으면 간병은 절대 걸리지 않는답니다. 간은 내가 진짜 웃는지 가짜로 웃는지를 구별 못한대요.” 그 한마디에 은혜를 받았다. 그러면서 하는 말. “사기꾼은 절대 간암에 걸리지 않는대요.” 한참을 웃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식당이나 공공장소에서 나를 찾는 일은 너무나 쉽다고 한다. 우선 목소리가 커서이고 웃을때에 굉장한 소음(?)을 내기 때문이다. 폭소가 터지면 그냥 웃지 않는다. 옆 사람을 때리거나 박수를 치면서 웃는다. 어떨 때는 탁자까지 친다. 목사로서 조금은 품위를 지켜야 하는데 나는 그게 잘 안된다. 한참 웃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면 멋쩍을 때가 많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웃는 것이 습관이 되어 쉽게 고쳐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정신적으로나 육신적인 건강을 위해서 그렇게 웃는 것을 유지하기로 하였다.
너무 재미있어서 배가 아프도록, 눈물이 나올 때까지, 숨이 넘어갈 때까지 크게 웃어보라! 기분이 좋아지고 가슴이 후련해 진다. “웃을 일이 있어야 웃지요? 이 불경기에 웃음이 나옵니까?” 반문해 올지 모른다. 윌리엄 제임스의 명언을 새겨보자! “우리는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이다.” 웃으세요. 지금 활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