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몰라요!

by 관리자 posted Sep 1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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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하일성.jpg

 

 

 매우 친숙한 목소리, 걸쭉한 입담, 야구인다운 외모. 수십 년간 야구해설가로 명성을 날리며 모두에게 친숙하게 다가온 남자. 그는 야구해설을 하다가 종종 외쳤다. “야구, 몰라요!” 상상을 초월하는 역전극이 벌어질 때나 경기흐름이 예상을 벗어나 전개될 때에 여지없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던 ‘멘트’였다. 야구만이 아니다. 인생도 모를 일이다. 언제까지나 그의 시원스런 해설로 야구경기를 즐길 수 있을 것 만 같았는데 어느 순간 소식이 묘연해졌다. 갑자기 불거진 추문에도 ‘그럴 리가 있을까? 시기하는 어떤 사람들의 모략일거야!’하며 지나쳤다. 그런데 지난 8일 난데없이 그의 자살 소식이 들려왔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인생, 참 모를 일이다.

 

 “뒤르케임”은 그의 <자살학>이라는 저서에서 사회적 연대관계나 결속력 정도를 자살요인으로 삼았다. 그는 자살의 유형을 “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이라는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이기적 자살”은 가정파괴나 빈곤 등 공동체의 유대의식의 약화에 따른 자포자기적 자살이다. “이타적 자살”은 그가 속한 집단이나 공동체에 대한 지나친 결속력에 따른 타자 지향적 자살이다. “아노미적 자살”은 자살자가 당면한 어려운 현실 앞에서 자기 혼돈(anomie)이나 착각에 의한 자살 유형이다.

 

 오늘날 가장 많은 유형은 “아노미적 자살”이다. ‘자기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적막감이 찾아올 때, 삶의 절망적인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에 판단력과 냉철함을 잃어버린 순간에 사람은 죽음을 생각한다. 거기다가 남성의 경우에는 “자존심, 명예, 사회적 지위”를 1순위에 놓기에 확률이 높아진다. 하일성씨의 경우 5,000만원에 빚보다 사기혐의가 그 삶을 더 짓눌렀는지도 모른다. 잊을만하면 들려오는 유명인들의 자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일반인과 유명인의 죽음의 여파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한국인들은 감성적인 민족이다. 그 말은 내가 좋아하고 흠모하는 인물과 나를 동일시하는 표현하기 어려운 상관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간다는 뜻이다. 따라서 유명인의 죽음은 또 다른 불상사를 불러올 위험이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소중한 것이다. 창세 이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태어나고 한생을 풍미하고 떠나갔다. 우리는 지금 주어진 이 시대를 충실하게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다. 언젠가 화요일 밀알 모임을 위해 라이드를 하는 중, 시각 장애를 가진 자매와 자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장애를 만나며 생의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단다. 그래서 21살, 23살 때 -두번이나 자살을 기도 했던 이야기를 했다. 죽음이 어떤 것인지. 그 자매는 체험 했다고 했다.

 

 건강하던 한 대학생이 갑자기 몸에 ‘이상 징후’가 왔다. 워낙 젊은 나이기에 별일 없으려니 했는데 점점 몸 상태는 심각해져갔다. 병원에 가서 종합 진단을 받고 1주일 후 의사를 찾았다. 의사는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몸에 종양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자세한 결과를 기다리며 다시 1주일이 지나갔다.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다행히 “암은 아니라.”고 했다. “간단한 수술을 하면 될 것 같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병원 현관을 나서는 그의 눈에 파아란 하늘이 들어왔다. 그는 이런 고백을 했다. 매일 보던 태양, 매일 마시던 공기, 매일 보던 들풀인데 그 날은 느낌이 전혀 다르더라고.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더라고 했다. 그는 지금 건강한 몸으로 가정을 꾸미고 행복한 생을 살고 있다.

 

 자살하는 사람이 용감해 보여도 따지고 보면 가장 비겁한 사람이다. 자신의 죽음으로 가족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자살은 끝이 아니다. 죽으면 끝나는게 아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 세상이 끝나면 저세상이 있다. 성경은 심판이 있음을 경고한다.(히브리서 9:27) 장애를 가진, 특별히 전신 마비 장애를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장애인들에게 자살은 실로 사치스러운 단어이다.

 

 살아야한다. 자살은 안 된다. 죽을 각오로 살자! 그러면 밝은 날이 오고야만다. 자살을 거꾸로 읽어보라! → “살자!” “내힘들다!” → “다들힘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