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소녀들의 함성 “밀알의 밤”

by 관리자 posted Oct 2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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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알의 밤이 열네 번째 기적을 남기며 막을 내렸다. 스산한 가을기운을 헤치고 찾아온 수많은 동포들의 사랑을 가슴에 머금을 수 있었음이 행운이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다. 갖가지 과일과 다양한 모양의 곡식이 저마다 풍성한 열매로 한해의 삶을 그려낸다. 14년 전, 자그마하게 시작했던 밀알의 밤이 이제 가을이 가까워오면 동포들의 호기심과 기대감을 자극하는 최대이벤트로 자리를 잡았다. 햇수를 거듭하며 참석했던 연인원을 헤아리면 한인동포라면 한번쯤은 밀알의 밤 공연을 관람했음직하다.

 

 금년 메인게스트인 “박완규”를 두고 항간의 많은 말들이 떠돌았다. “아, 그 까만 썬글라스의 사나이”부터 “못생긴 남자”까지. “아니, 그 사람 로커 아니예요? 박완규가 예수를 믿어요?” 직설적인 질문을 웃음으로 받아내며 행사를 준비해야했다. 포스터용 사진을 보내왔는데 한결같이 검은 색상 옷에 썬글라스를 착용한 범상치 않은 것들만 수두룩했다. 디자이너와 고심 끝에 포스터 제작을 했지만 분위기는 그냥 그랬다. 밀알의 밤을 얼마 앞두고 후배 목사를 만났다. “성도들에게 독려해서 밀알의 밤에 많이 참석하도록 애써줘” 부탁을 했더니 “목사님, 사실 박완규씨가 오니까 밀알의 밤에 많이 가라는 광고를 못하고 있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게스트의 이미지가 사람들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물의가 있었는가보다.

 

 하지만 박완규를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무대에 올라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며 감사의 마음이 올라왔다. 그는 겸손하고 진실했다. 프로니까 노래를 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의 진솔한 간증에 사람들은 장장 1시간 40분 동안 촉각을 세우며 경청을 했다. 무엇보다 공연 내내 뒤편에서 들려오는 강렬한 외침이 인상적이었다. 3, 40대에 접어든 아줌마 부대(?)였다. 곡이 끝날 때 마다 그리고 노래 간간히 그들은 마치 소녀시절로 돌아간 듯이 함성을 지르며 공연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멀리 캐나다에서 <박완규 팬클럽>이라며 찾아온 부부의 모습에 또한번 놀랐다. 그녀들도 소녀시절이 있었다. 박완규가 “천년의 사랑”으로 스타덤에 올라 맹렬한 활동을 펼치던 시절 그녀들은 가슴을 ‘통탕’거리며 그의 노래에 매료되어 살았을 것이다.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가수가 내 눈앞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신통한 일이 아닐까?

 

 나도 그리도 좋아하던 “김정호”가 생맥주 홀에서 기타를 치며 “이름 모를 소녀”를 생음악으로 들려 줄때에 황홀경에 빠졌던 경험이 있다. 박완규는 온실에서 생겨난 가수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 아픔의 시간을 지나 숙성된 진짜 가수였다. 그를 초청하며 그의 노래에 기대를 걸었었다. 하지만 박완규는 당일 간증을 통해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 사람 보기보다는 노래와 신앙이 대단한 사람이네요!” 당일 참석한 분들의 한결같은 소감이다. 박완규 씨는 이날 송명희 시인의 '나', 고형원 대표가 작곡한 '나의 길' 등 찬양 외에도 부활의 '네버엔딩스토리', 마음을 닫은 딸을 위해 지은 곡 '사랑하기 전에는', 부모를 위해 부른 첫 노래인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열창했다.

 

 그러면서 부부의 이혼으로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린 19살 된 딸 “이슬”의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같은 애비로서 가슴이 아려왔다. 부모의 이혼으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딸을 보며 그는 그가 진짜 해야 할 일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딸의 담임선생님은 “‘아이에게 잘 해주고, 관심을 많이 두라’고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이가 학교를 쉬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딸이 아프니 아빠는 웃을 수 없었다. 그는 장애아동들의 친구로 살기를 원한다. 미국에서 만난 밀알 봉사자들을 만나며 재도전을 받고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리라고 그는 다짐했다.

 

 수많은 날을 마음조리며 준비했던 밀알의 밤이 아름답게 막을 내렸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라는 노래처럼 행사를 치르고 나면 감격스러운 마음 한켠에 아쉬운 마음이 꿈틀댄다.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부터 “조금 더 많은 분들이 참석했으면 좋았으련만”하는. 이제 10월의 막바지이다. 그때 그 소녀들이 이제 엄마가 되어 살아가지만 박완규의 노래에 환호하며 소녀로 돌아가던 박수소리와 함성의 여운이 애써온 보람을 느끼게 해 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