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정보통신 천국시대가 되었다. 한국에 가보면 어리디어린 아이들도 모두 핸드폰을 들고 다닌다. 젊은 시절에 외국영화를 보면 길거리에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는 장면이 있었다. “저게 가능할까?” 생각을 했는데 이제 그 모든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부목사 시절에 동부교회에서 교구와 제3남전도회를 지도하고 있었다. 당시 회장이던 김영구 집사님이 지금생각하면 너무도 투박한 모토로라 핸드폰을 구입했는데 얼마나 신기하던지 만지작거리며 여기저기 전화를 해댔었다. 그때가 1990년으로 기억된다.
사실 80년대 초 만해도 가정집에 전화가 흔치 않았다. 그래서 대중들에게는 공중전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화 한 통화를 걸기위해 앞사람의 전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드디어 차례가 오면 깨알같이 적힌 전화번호 수첩을 꺼내 다이얼을 돌린다. “어떤 목소리 톤일까? 어떻게 내 전화를 받을까?” 설레이는 마음으로 신호가 가는 소리를 기다리면 동전이 떨어지며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무나도 반갑고 선명하고 잘 들리던 그때의 공중전화 한 통화.
친구는 친구에게, 이성 친구에게, 고향 떠나온 자식은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군대 간 현역군인은 고참 눈치 보며 부대막사 앞 공중전화 박스 앞에서 너무나도 보고 싶은 애인에게 “혹시 고무신을 거꾸로 신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통화를 한다. 틈만 나면 한번이라도 더 전화하고자 마음 졸이며 나누었던 애인과에 대화가 공중전화에는 그대로 담겨있다. 그 당시 공중전화는 사람냄새를 맡게 하며 소중한 사람과의 정을 더 끈끈하게 이어주는 역할을 해 주었다.
핸드폰 열풍이 불면서 편리해지고 신속해 진 것은 틀림이 없는데 사람냄새가 사라진 것이 아쉽고 사람들마다 무언가에 집착하며 사는 것 같아 서글퍼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점점 개인주의가 되어가는 세상이 무섭기까지 느껴진다. 공중전화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배려와 양보가 있게 하였고 친구는 친구에게,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선배는 후배에게 끈끈한 사랑을 느끼게 해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해주었다.
담임 목사가 되어 연말에 여전도회로부터 삐삐를 선물 받았다. 처음에는 삐삐가 하도 안 울려 목양실에 앉아 교회전화로 스스로 삐삐를 치던 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운전을 하다가 중요한 삐삐호출이 오면 급하게 차를 세워놓고 공중전화를 통해 통화를 해야 만 하였다. 젊은이들은 삐삐를 통해 연락을 하고 사랑을 나누었다. 허리춤에 찬 삐삐에 호출 전화가 뜨면 가슴이 설레이고 공중전화 다이얼을 돌리며 ‘소중한 사람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할까?’를 상상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삐삐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금방 핸드폰이 전 국민에 필수품으로 자리 잡는데 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역시 한국인이다. “빨리빨리”의 힘은 대단했다. 이제는 누구나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세상이 되었다. 이렇게 손안에 핸드폰을 하나씩 다 가지고 있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누는 인정은 공중전화와 삐삐가 있던 그 시절 보다 훨씬 더 못한 것 같다. 아마 그 이유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삶에만 집착하면서 살기 때문이 아닐까? 자기 밖에 모르는 개인주의가 팽배해가기 때문이다.
손안에 전화가 있는데 이상하게 공중전화를 사용할 때보다 친구들과의 통화는 더 뜸해지고 어쩌다 전화를 하면 안부를 묻는 정도가 고작인 것 같다. 차라리 불편하고 더뎠지만 공중전화를 쓰던 시절이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았던 것 같다. 한국에 가보면 아직도 공중전화 부스가 드문드문 있기는 있다. 거의 쓰는 사람이 없는 외톨이가 되어서 말이다. 앞사람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시간에 우리는 그 사람을 생각했었다. 무슨 말을 할지도 곰곰이 되뇌었다. 전화번호를 암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두뇌활동이 활발했었고 연상법을 사용하여 나름대로의 암기법이 절실히 필요하기도 하였다. 사람을 생각하며 걸던 공중전화 시대가 그래서 더 행복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