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번째 밀알 캠프가 막을 내렸다. 29년, 사실은 32회가 맞다. 코로나 사태로 꼬박 3년을 엄두도 못내고 기다려야 했다. 항상 7월 중순에 캠프가 개최되는데 준비는 거의 1년이 걸린다. 캠프가 마치는 날, 호텔 측과 차기 장소 계약을 맺어야 한다. 600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장소를 구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북미에 16개 밀알 지단이 사역을 하고 있다. 서부는 일찌감치 6월에 캠프를 연다. 주로 장애아동 중심에 캠프이다.
동부 캠프는 성인 장애인과 장애아동 캠프가 별도로 열린다. 아동 캠프는 영어로, 성인 캠프는 한국어로 진행된다. 캐나다 토론토, 뉴욕, 뉴저지, 시카고, 필라델피아, 워싱턴, 캐롤라이나, 리치몬드, 아틀란타, 마이애미까지 모여오는데 시카고는 15시간, 아틀란타는 무려 25시간이 걸려 당도한다. 결국 캠프 전날 출발해야 하고, 갈 때도 오전 중에는 떠나야 다음날 주일예배를 드릴 수가 있다.
29번 캠프를 감당하면서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그 많은 인원들이 매년 한자리에 모여 아무 사고 없이 물흐르듯 진행되는 모습이 신기하다. 단장들의 노심초사는 말로 표현이 안 된다. 장애인들이 얼마나 캠프를 좋아하는가 하면 캠프가 끝나는 그날 내년 캠프를 기다릴 정도이다. 몇 년전인가? 밀알선교센터 지하에 걸려있는 달력이 다 찢겨나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런 일을 할만한 사람이 없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폐장애를 가진 아동(여)이 캠프가 가고싶어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다. 가만히 보니 달력은 7월에 가있었다. 그때가 5월이라고 기억한다.
캠프는 자원해서 참석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주위에 권유에 의해, 혹은 단장 목사들의 간청으로 참석한 분들이 있다. 특히 장애아를 둔 학부모들은 귀찮고, 아이가 캠프에 가면 조금은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기에 망설이다가 참석을 한다. 마지막 날, “은혜의 한마디” 시간이 대미를 장식한다. 둥그렇게 둘러앉아 캠프에서 경험하고 받은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다. 아틀란타 밀알 장애아 어머니가 “이렇게 좋은 곳인 줄 모르고 괜히 버팅겼다”면서 “캠프에 참석하여 인생관도 신앙의 차원도 달라졌다”는 말로 모두의 눈시울을 적셨다.
박종훈 형제. 30년전 교통사고로 오직 전동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하는 중증 장애인이다. 그는 어머니와 29년 동안 캠프 개근을 했다. 아들의 애처로운 모습을 바라보는 90 노모의 간증에 분위기는 달아올랐고 우레와 같은 박수로 모자를 격려했다. 힘겹지만 매년 캠프에 참석하는 이유는 “오기만 하면 삶의 힘을 얻고 타주의 장애인들을 만나면 즐겁기 때문이라”고 했다.
금년 캠프에는 오랜만에 나의 큰 딸이 함께 했다. 사위와 함께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 힘이되어 주었다. “은혜의 한마디” 시간에 딸이 마이크를 잡았다. “밀알이 좋은 것은 세상에 편견과 차별의 시선에서 벗어나 한 형제, 자매인 것을 느끼는 자리여서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은 지체장애인입니다. 아버지는 살아오면서 남들과는 다른 걸음걸이 때문에 많은 벽에 부딪히며 살아오셨지만 밀알에서는 지극히 평범합니다. 저희 아버지를 사람들은 장애인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가끔 “나도 장애인이야” 할 때가 있습니다.(웃음) 밀알에 오면 약하고 불편하고 아팠던 것이 자랑스러워집니다”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다가 갑자기 울컥하고 무엇인가가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 딸이 “우리 아버지는 장애인입니다”라는 말을 할 때에 만감이 교차했기 때문이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슬그머니 일어나 저만치서 고개를 돌리고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가까스로 침착성을 유지하며 다시 자리를 잡았다.
자녀는 나이를 먹어도 부모 눈에는 어린아이로 보인다. 딸의 고백 속에서 아빠의 아픔을 헤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대견하고 고마운 마음이 밀려왔다. 그렇게 온 가족이 하나되는 곳이 밀알 캠프이다. 그렇게 캠프는 끝나고 시간은 또 흐르고 있다. 진정 금번 캠프는 바로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