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은 사람의 몸에서 흐르는 고귀한 액체이다. 극한 감격 속에서도 흐르지만 대부분 고통스러울때에 배출된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시인이었던 괴테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모른다”라고 했다.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극한 한계에 서본 사람만이 인생의 참맛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영감있는 설교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눈물이다. 십자가 앞에서 통곡해 본 사람만이 성도들의 심장을 흔들 수 있는 것이다.
『죽은 목회자』라는 책이 있다. 그 내용이 심히 심각하다. 죽은 목회자는 먼저 “사람을 모른다.” 신학을 공부하고 졸업을 하지만 사실 목회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다. 목사가 사람을 모른다면 그것은 심각한 상황이다. 어떤 사람이 산길을 가는데 원숭이 한 마리가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시냇물에서 고기를 잡아 자꾸 육지에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도 이상해서 원숭이에게 물었다. “아니, 너는 왜 멀쩡하게 살아있는 고기를 잡아 땅에 던지는 거냐?” 그때 원숭이가 정색을 하며 대답을 하더란다. “지금 이 물고기들이 물에 빠져 살려달라고 해서 건져내는 중입니다.” 만들어 낸 이야기요,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이야기지만 놀라운 것은 이런 ‘원숭이 목사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죽은 목회자”의 또 다른 특징은 “자신을 모른다.”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모습도 성찰하지 못한 채 목회를 하는 것이다. 가슴에 ‘분노’가 가득 찬 목사가 있다. ‘욕심, 질투, 미움, 쾌락’ 문제를 넘어서지 못하고 양을 만난다. 그러다보니 마음이 얼어붙을 수밖에. 비교 의식에 시달리고 나중에는 육체까지 얼어붙어 버린다. 이미 굳어버린 영혼을 안고 강단에 오르는 셈이다.
목사는 강단에 올라갔을 때에 힘이 들어가면 안 된다. 아주 자연스러워야 하고 남의 말이 아니라 내가 만난 그리스도, 내가 체험한 말씀이 흘러나와야 한다. 그런데 마음도, 육신도 얼어붙어 버렸으니 거기서 무슨 능력이 나오겠는가?
겨울에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매우 부드럽다. 그런데 그 눈이 쌓이면 양상이 달라진다. 얼어붙어 단단한 얼음덩어리가 되기 때문이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그 눈이 녹기 시작하는데 그 물이 “눈물”이다. 누구에게나 퍼져 앉아 울어본 경험이 있다. 억울해서든, 서러워서든 울 때는 고통스러운데 울고 나면 가슴이 시원해진다. 겁이 사라진다. 가슴에 얼음덩어리가 다 녹아내렸기 때문이다. 눈물은 얼어붙은 마음과 육신을 녹여내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목사와 성도의 눈에 눈물이 메말라 버린 것이다. 중학 동창 중에 눈물이 넘치는 친구가 있다. 그는 포항 구룡포에 있는 “석병 교회”를 담임했던 이훈 목사이다. 그가 그 교회에 부임했을 당시 교회는 사분오열 되어 있었다. 오랜 분쟁으로 성도들은 상처투성이였다. 이 목사가 부임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당회원은 교묘히 그를 괴롭혔다.
그때 이 목사는 마냥 울었다. 길을 가다가 그 장로와 마주치면 풍채가 좋은 이 목사는 다가가 끌어안았다. 처음에는 당황하며 물리치던 장로가 어느 순간부터 같이 끌어안고 울기 시작하였다. 토요일이 되면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화장실을 청소하는 장로로 변화되었고, 자그마한 어촌 교회에 새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포항 시내에서 사람들, 특히 젊은 청년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훈 목사는 나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도 잘 운다. 그 친구를 통해 한가지를 깨달았다. 목사는 잘 울어야 한다고. 눈물을 머금은 마음을 타고 나오는 설교가 성도들의 삶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예수님도 잘 우셨다. 눈물은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아내 앞에서 울 수 있는 남편이 가장 용감하다. 자식들 앞에서 울 수 있는 부모는 위대하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호르몬의 변화 때문인지? 나는 사람들과 대화하다가 잘 운다. 울어야 한다. 거기에 소망이 있다. 핏대가 선 눈망울을 천사의 눈으로 바꾸기 위해 누군가를 끌어안고 울어야 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