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을 마당에서 보냈다. 남자아이들은 비석 치기, 자 치기를 하고 놀았고, 여자애들은 주로 공기놀이, 고무줄 넘기를 하며 한나절을 보냈다. 누가 무어라 하지 않아도 동네 아이들은 마당으로 모여 들었고, 무엇이 그리 재미있었는지 함박 웃음을 지으며 추억을 쌓았다. 때로는 장난이 지나쳐 피가 나는 일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마당에서 뒹굴었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나면 어깨동무를 하고 동네 한바퀴를 돌았다. “어, 어, 애들 모여라! 여자는 필요없고 남자 모여라!” 그래도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어, 어, 애들 모여라! 남자고, 여자고 모두 모여라!” 그렇게 외치다 보면 아이들은 마당으로 삼삼오오 모여 들었다. 전기도 없는 그 시절에 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놀이는 ‘숨바꼭질’이었다. 어떤 아이들은 굴뚝 옆에, 남의 집 어두컴컴한 부엌 구석에, 볏 짚단 속으로, 나무를 타고 오르며 몸을 숨겼다.
그러다가 공교롭게도 음침한 공간에 동갑 여자애랑 숨어들어 피할 사이도 없이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기도 했지만 밤중이라 드러나지 않아 다행인 순간도 벌어졌다. 남 · 여 함께 어우러져 이야기를 나눌라치면 한번도 다정다감한 분위기는 연출되지 못했다. 뭔가 시비를 걸려고 별러온 사이처럼 티각태각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럴 수밖에 거기에는 동생, 오빠, 누나, 형들이 뒤섞여 있었기 때문에 살가운 대화가 오가는 분위기는 기대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당시 마당이 넓은 집은 동네에서 그런대로 부와 명성을 나타내는 집안이었다. 마당은 잔치가 열리는 공간이었다. 마당에서 혼인예식이 진행되었고 사모관대를 한 신랑과 족두리에 연지, 곤지를 찍고 발그스름한 얼굴로 수줍어하던 신부의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사람이 죽었을 때에는 마당에서 상여가 출발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상여 인도자가 앞에서 종을 딸랑이며 구성지게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선창을 한다. 상여꾼들은 “어어야~ 이이제~” 추임새를 넣었다. 이것을 요령(搖鈴)이라고 한다. ‘왜 그리 상여가 더디 나가나?’했더니 망자(亡子)의 노자돈 명목으로 상주로부터 돈을 받아내기 위한 행위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잔치나 큰일이 있을 때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 차일을 쳐서 손님을 접대하였으며, 추수철이 되면 마당에서 타작을 하고 곡식을 말렸다. 요란한 탈곡기 소리는 풍년의 상징이었다. 보통 두명이 짝을 지어 발로 밟아대며 곡식을 털었다. “웽웽”거리는 탈곡기 소리가 온 동네에 퍼져가며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마당은 농악대가 노니는 공간이었다. 보통 나팔수가 앞장 서면 꽹과리와 징이 뒤 따랐고, 상모돌리기와 소고를 든 아녀자들이 장단을 맞추며 흥을 돋우웠다. 나의 사촌 재권 형은 열두발 상모돌리기의 달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한 발이 보통 1.5~1.8미터이니 열두발이면 대략 18~20미터가 된다. 이것을 밟지 않고 끌리지 않게 잘 돌려대는 형의 재능에 동네 사람들은 혀를 내돌리며 감탄을 연발했다. 열두발 상모는 긴끈(채상)에 무게추를 달아 원심력을 이용해야 하기에 다른 상모돌리기와 달리 단독 공연을 한다. 농악놀이에 피날레였다고나 할까?
빨리 커서 꽹과리를 마음껏 쳐보고 싶었던 것은 아버지가 워낙 꽹과리를 잘 치셨기 때문이었을까? 한 여름, 멍석 위에 커다란 상이 놓이고 저녁을 먹고 나면 모깃불의 연기를 벗 삼아 두런두런 이야기 꽃을 피우던 곳도 마당이었다. 당시는 농업 사회였고, 대가족이 주를 이루던 때였다. 마당에서 아장거리며 걷기 시작하는 손자의 재롱을 보고 박수를 보냈고, 명절이 되면 서울에서 내려온 자녀들이 큰절을 하며 효도하던 곳도 마당이었다.
이제는 흙이 드러나 있는 공간을 찾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흙에서 왔기에 흙을 밟고 흙냄새를 맡으며 살아야 건강 하건만 마당보다는 아스팔트가, 시멘트의 매끈한 공간이 익숙하고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다. 마당이 살아야 한다. 삶의 마당을 회복해야 한다. 진정 마당에서 사대가 웃음 꽃을 피우던 그 시절은 돌이킬 수 없는 추억이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