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온통 퍼센트(%)가 지배하고 있다. 시청자들이 즐겨보는 드라마나 예능프로의 시청률부터 크게는 각 나라마다 정치지도자를 선출하기 전에 실시하는 여론조사까지. 맞는 것도 같고 그렇다고 절대적이지 않은 퍼센트에 세상은 요동치고 있다. 모든 것이 통계에 좌우되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퍼센트(%)가 은근한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사람은 다수에 약해지는 습성이 있다. 이 길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몰리면 흔들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회의 결정에 “다수결”이 적용되고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쳐왔는지는 역사 속에서 증명된다. 처음에는 소수의 사람들로 시작되는 퍼센트(%)가 어느새 전 세계 사람들을 세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선거의 묘미는 “과연 입후보자 중에 누가 당선될 것인가?”이다. 어린 시절, 선거가 있는 날이면 어머니는 단정한 모습으로 투표에 참가하셨다. 집에 들어서는 어머니를 향해 물었다. “엄마, 엄마는 누굴 찍었어?”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시며 “재철이 찍었지?”라며 즉답을 피해가셨다. 배운 것은 많지 않으셨지만 선거의 원칙이 “비밀 선거”라는 사실을 어머니는 일찍이 인지하셨던 것이다.
퍼센트(%)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 것이 방송이다. 소위 ‘시청률’(%)이라고 하는 것이 드라마에 출연하는 연기자뿐 아니라 제작자들을 잠 못 자게 만든다.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혹은 작품)가 꼭 좋은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인간의 윤리법칙을 벗어난 소위 ‘막장 드라마’가 시청률의 지지를 업고 시청자들을 오염시켜 가고 있다.
드라마가 무서운 것은 마치 지금 세태가 모두 그런 것처럼 호도하는데 있다. 시청률이 낮은 드라마가 시간을 두고 생각하면 걸작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관객이 들지 않아 참패한 영화가 시간이 지나며 명작으로 인정받아 역주행하는 경우도 있다. 시청률을 높이려고 벼라별 방법을 동원하는 모습이 애처롭고 시청률에 춤추는 세태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새 학기가 시작되면 꼭 앙케이트(Survey)가 있었다. 바로 “가정환경 조사서”이다. 부모의 학력으로부터 “집에 가전제품은 어떤 것이 있느냐?”는 질문이 즐비하였다. 지금은 웃음이 나오지만 “라디오, 다리미, TV, 전축”등의 유무부터 “집은 자택이냐? 전세냐? 월세냐?”하는 질문까지 이어졌다. 특히 “생활 정도가 어느 정도냐?”라는 질문을 하면서 ‘상중하’중에 동그라미를 치도록 만들어 놓았다. 몇몇 부유층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中)에 표시를 하였다. 그런데 굉장히 가난한 내 짝꿍도 “중”(中)에 동그라미를 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일찍부터 퍼센트(%)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실감하였다.
스칸디나비아 항공사 사장이었던 얀 카를손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어느 한 분야에서 100퍼센트 향상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100가지 일을 놓고 1퍼센트 향상만을 추구합니다.” 이때의 1퍼센트를 경영학에서는 「티핑 포인트」라고 한다. 「티핑 포인트」란, ‘처음에는 있는 듯 없는 듯 그 존재가 미미하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봇물처럼 터지는 순간’을 말한다.
가령, 처음엔 인기가 별로 없었던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가 어느 순간 갑자기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호리바 마사오가 쓴 <남의 말을 듣지 마라>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우리 귀에 들어오는 정보 가운데 99퍼센트는 아무런 쓸모없는 노이즈다. 성공하려면 1퍼센트 신호를 구별해 내야 한다. 성공한 사람은 노이즈 99퍼센트와 신호 1퍼센트를 구별할 줄 안다. 남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게 아니라 신호 1퍼센트에 전심전력을 다해 집중하기 때문이다.”
<끌리는 사람은 1퍼센트가 다르다>라는 책도 있다. 이렇듯 1퍼센트로 성공이 결정되고 1퍼센트로 실패한다. 퍼센트(%)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진정성이다. 퍼센트를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그 흐름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여 내 본질과 주장을 흐려버리는 것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