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면서 사람을 통해 감동을 받는 것처럼 행복하고 흥분되는 일은 없다. 신학대학에 들어가서 처음 나를 감동시킨 분은 “박윤선 박사님”이셨다. 풋풋한 인상의 교수님은 웃으시면 약간 입이 비뚤어지셨다. 그 옛날 “웨스트민스터”(필라) 유학을 하시고,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신구약 성경을 주해한 대학자이면서도 교수님은 항상 겸손하셨다. 제자들에게 마치 이웃집 아저씨처럼 다정다감하게 다가오셨다. 그러면서도 강의는 예리했고, 외치시는 말씀은 가슴을 파고들었다. 경건회(채플:신학대학은 매일 예배를 드림) 시간에 박윤선 박사님이 강사로 서실 때면 내 눈은 항상 흥건히 젖어있었다. 허스키하면서도 나지막한 음성의 설교는 나뿐 아니라 학우들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내 생애 박윤선 박사님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미션스쿨이었다. 3학년 가을. “졸업생을 위한 부흥회”가 열렸고, 강사로는 “김종수 목사님”(영세교회)이 초대되었다. 당시 나는 신앙부장을 맡고 있었다. 호출을 받고 들어선 교목실에서 마주친 목사님의 첫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한국 전통 두루마기를 입고 계셨기 때문이다. 웅변을 하신 분이라서인지 음성이 또렷했다. 설교 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신앙의 가정에서 성장한 목사님은 고교시절부터 방황을 시작하다가 연대에 들어가 응원단장을 맡으면서 완전히 세상길을 헤매다가 ‘돌아온 탕자’였다.
그래서인지 목사님의 메시지는 호소력이 있었고 시대적으로나 환경적으로 곤고한 우리들에게 대단한 감화력을 끼쳐주었다. 그 후로도 나는 김 목사님을 종종 만날 수 있는 영광을 얻었고, 장성하여 목회를 하면서 많은 조언을 받았다. 특이한 것은 목사님은 나를 만날 때마다 “형님!”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그분은 누구를 만나도 진심이 담긴 마음으로 그렇게 부르셨다. 처음에는 너무도 황송했지만 나이도 어리고 한참 후배를 공대하시는 목사님의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그분은 내 목회의 멘토셨다.
작년, 12월 29일(화). 여느 때처럼 <귀니드 양로원>을 찾았다. 화요일이 다섯 번 있는 달에는 내가 설교 담당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예배가 드려졌고, 이어 2부 순서가 진행되었다. 이미 디렉터 ‘수잔나 박’을 통해 통보를 받은 내용이었지만 그날은 오랫동안 양로원을 운영하던 분이 다른 경영자에게 운영권을 넘기고 인사를 하는 날이었다. 경영자 “모리스 캐플란” 원장에게 감사패가 주어지고 인사를 위해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먼저 자신의 조상들도 미국에 온 이민자였음을 밝히는 것으로 운을 띄웠다.
귀니드 양로원은 “아버지가 오픈한 곳이며 3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했다. 2002년부터 연로한 아버지를 대신해 변호사직을 내려놓고 14년 동안 양로원을 직접 운영해 왔음을 회고했다. 특별히 한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어르신들을 받아들이고 봉사를 해왔기에 한인들에게 남다른 친숙함을 느끼고 있음을 피력했다. <귀니드 양로원>은 항상 97%의 노인 입주율을 자랑하는 곳인데 그중에 25%가 한인들임을 밝혔다.
“모리스 캐플란” 원장은 “한인사회가 웃어른을 공경하는 모습을 인상 깊게 느끼며 이것은 미국사회가 보고 배워야할 좋은 문화이다.”라고 하면서 경영자의 직무를 다하지 못하고 다른 곳에 경영을 넘겨야하는 아쉬움을 토로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앞에 앉아있던 나는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어르신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한인들을 귀하게 여기는 백인의 진심어린 눈물을 보았기 때문이다. 목이 메어 울먹이며 아쉬움을 토로하는 그의 모습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그는 “그동안 한인사회가 귀니드 양로원에 많은 관심과 성원을 보내준 것에 감사하며 또한 새로운 경영책임자에게 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당부했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많은 사람을 만난다. 만나면 정이 가고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있다. 대화를 나누며 많은 것을 깨닫게 되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는 사람이 있다. 함께 있기만 해도 행복해 지는 그런 사람이 있다. 사람을 잘 만나는 것이 그래서 큰 복이다. 오늘도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