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보여주는 빛을 볼 수 있다면

by 관리자 posted Jun 3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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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과 풍차.jpg

 

 바람이 분다. 얼굴에 머물 것 같던 바람은 이내 머리칼을 흔들고 가슴에 파고든다. 나는 계절을 후각으로 느낀다. 봄은 뒷곁에 쌓아놓은 솔가지를 말리며 흘러들었다. 향긋하게 파고드는 솔 향이 짙어지면 기분 좋은 현기증이 봄이 가까이 왔음을 알게 했다. 여름은 굴뚝 근처에 번져가는 곰팡이를 스쳐가는 ‘퀘퀘한 내음’으로 다가왔다. 선풍기도 없던 시절에 부채질은 더운 열기를 돋우워 잠자리를 설치게 했다. 어쩌다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덕에 겨우 꿈나라로 향할 수 있었다. 가을은 스산한 기운으로 오동나무 잎을 훑으며 다가섰다. 바람이 부는 대로 쏠려 다니는 낙엽 구르는 소리가 세월의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겨울은 전깃줄을 타고 휘몰아치며 아이우는 소리를 내며 불어댔고, 그럴때면 우리는 온돌 깊숙이 몸을 숨겼다.

 

 바람 중에 가장 예쁜 “하늬바람”이 있다. 사실 ‘하늬바람’은 농부나 뱃사람들이 ‘서풍’을 부르는 말이다. ‘하늬’는 뱃사람의 말로 서쪽이란다. 따라서 ‘하늬바람’은 맑은 날 서쪽에서 부는 서늘하고 건조한 바람을 말한다. 습하고 무더운 ‘된마(동남풍)’에 상대되는 바람이다. 무더운 여름철에 부는 ‘하늬바람’은 말의 느낌만큼이나 실제로도 상쾌한 느낌을 주는 바람이다. 때늦은 장마가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끈적이는 습도 때문이었다. 후덥지근한 장마도 지나가며 이파리 무성한 숲길에서는 매미 소리가 요란하고, 언덕배기로 서늘한 하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어느덧 방학이 끝날 무렵이었다.

 

 뉴햄프셔 주에 있는 ‘White Mountain’ 정상에 오른 적이 있다. 방갈로를 나서자 세찬 바람은 친구의 선글라스를 허공으로 냅다 날려버렸다. 난감해 하는 친구를 향해 다른 친구가 소리쳤다. “그래도 바람을 맞는 것이 그렇게 건강에 좋단다.” 우리는 얼굴을 마주보며 웃어댔다. 바람은 때로 모든 것을 앗아간다. 미국 남부에 몰아치는 ‘토네이도’는 그동안 쌓아놓았던 모든 것을 공중분해 시켜 버린다. 태풍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태풍이 몰아치며 저 깊은 바닷 속을 휘저어놓기에 바다가 기나긴 세월의 흐름에도 청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청춘들에게는 자신도 가누지 못하는 바람이 있다. ‘질풍노도’라고 하지 않는가? 왜 그리 쏘다녔는지? 수업만 끝나면 달려가 죽치고 앉아있던 명동 ‘케잌파라’ 3층은 지금 생각해도 아련한 추억의 창이다. 고교시절에 여름방학은 캠핑으로 시작하여 끝이 났다. ‘텐트, 코펠, 라면, 통기타, 그리고 …’. 그렇게 뒹굴고 소리치며 놀아도 지치지 않았다. 무슨 그리 할 일이 많았는지?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칫솔하나로 돌아가며 이를 닦고, 악동들은 추억을 쌓느라 하루가 모자랐다. 개학을 하면 그 바람을 진정시키느라 한참을 힘들어 해야 했다.

 

 ‘가는 바람’은 약하게 솔솔 부는 바람이다. ‘간들바람’은 부드럽고 가볍게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며 ‘강쇠바람’은 첫가을에 부는 동풍을 일컫는다. ‘골바람’은 골짜기에서부터 산꼭대기로 부는 바람인데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매서운 겨울바람의 아픈 추억을 담고 살고 있으리라. ‘골바람’이 얼굴에 부딪히면 절로 눈물이 났다. 핑계 김에 서러움을 담아 울던 겨울을 잊을 수가 없다. ‘높새바람’이 있다. ‘동북풍’을 달리 이르는 말로 주로 봄부터 초여름에 걸쳐 태백산맥을 넘어 영서 지방으로 부는 고온 건조한 바람으로 농작물에 피해를 준다.

 

 바람을 기다려 본 경험이 있는가?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면 손수 만든 연을 들고 언덕배기에 올라섰다. 달리며 놓아버린 연이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긴 연줄이 곡선을 그리며 저만치 한 점이 되어 버렸다. 돛단배를 띄운 뱃사공이 반갑고 반가운 것이 강바람이다. 바람에 흐느적거리는 버드나무의 향연을 본적이 있는가? 한차례 소낙비가 지나간 후 바람결에 흔들리는 미루나무 잎에 ‘반짝거림’을 실눈을 뜨고 바라본 적이 있는가? 나무는 바람을 타고 잎을 흔들며 대화를 나눈다.

 

 한적한 깊은 산속 숲 소리와 바람의 빛깔을 알 수 있다면 자연의 언어인 바람을 통해 우리는 더 풍요로운 인생의 맛을 느낄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