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장이 내려다 보이는 아카시아 숲 7/15/2013

by admin posted Nov 2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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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등학교를 다섯 곳이나 다녔다. 경찰공무원인 아버지가 전근을 하실 때마다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전학을 가야했다. 그 나이에는 친구가 무엇보다 소중한 때이다. 오랫동안 깊은 정을 나누던 친구들과 억지로 헤어지는 아픔을 나는 일찍이 경험해야만 하였다. 이사를 가는 날에 나를 쳐다보던 친구들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나는 뺨을 타고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친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정든 사람들과 익숙한 곳을 뒤로하고 낯선 땅으로 떠나가는 그 아픔은 정말 견디기 힘든 과정이었다. 며칠 동안은 실로 멍한 상태로 새로운 학교에 다녀야만 하였다.

지금 같은 통신수단이 전혀 없던 시절이었기에 ‘편지’로 소식을 나누지만 그 기간은 길게 가지 않았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역시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격언이 맞는 다는 것을. 아팠지만 돌아보니 자연스럽게 풍부한 감성을 소유하게 된 과정이었다. 헤어짐의 안타까움을 경험하면서 내 가슴에는 이야기가 담겨져 갔다. 어린나이에 이별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고통인가를 깨달으며 철이 들어갔다. 반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훈련을 제대로 받았고 처음 만나는 사람과 금방 친해지는 좋은 성격도 그때부터 만들어져 갔다.

그런 유랑생활(?)이 끝난 것은 6학년이 되면서였다. 우리때만해도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었다. 나의 진학문제를 고심하던 아버지는 또다시 발령이 나자 누이에게 나를 맡기고는 옥천파출소(당시 지소)로 부임을 하시게 된다. 나는 그때부터 누이와 자취를 시작했다. 나의 자취방은 양평초등학교 끝머리의 자리한 집이었다. 주인집 아저씨는 양평 군청에 고급공무원이었고 3남매를 둔 집이었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입이재고 목소리가 커서 눈만 뜨면 큰소리가 터져 나오는 그런 분위기였다.

정말 외로웠다. 어린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산다는 것이 참 힘이 들었다. 무엇보다 엄마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집 뒷마당을 돌아서면 저만치 남한강이 눈에 들어왔고 삼각주를 이루는 강 한 복판에 비행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 공군비행장이었던 것 같다. 주로 정찰기와 군사용 헬리콥터들이 뜨고 내렸다. 우리는 그때 헬리콥터를 “잠자리 비행기” “송충이 비행기”라고 불렀다. 헬리콥터의 모양이 그런 형상을 하고 있어서였다. 집 뒷문을 나와 조금만 내려서면 아카시아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다른 나무도 아니고 가시가 무성한 아카시아지만 제법 작은 그늘을 만들어주며 운치가 있었다.

외로울 때마다 나는 그 아카시아 숲에 들어가 비행장을 내려 다 보았다. 가끔 공군들이 훈련하는 장면도 들어왔고 다양한 모양의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장면은 남한강과 조화를 이루며 어린 내 가슴을 달래주었다. 노래도 부르고 글도 썼다. 하모니카도 불었다.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남한강과 비행장은 부모를 떠나 살던 나에게 친구였고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감성 비행장’이었다. 가끔 친구들이 찾아오면 그 자그마한 아카시아 숲속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초여름이 깊어가며 꽃이 망울을 터뜨리고 그윽한 아카시아 꽃향기가 우리의 기분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일찍이 상담을 가르쳐준 “정태기 교수님”은 “과거에 기분 좋은 기억이 가슴에 남아있는 사람이 행복지수가 높다”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사역이 바쁘고 머리가 복잡해 질 때면 나는 가만히 앉아 비행장이 내려 다 보이는 아카시아 숲으로 추억 여행을 떠난다. 어린나이에 그 숲은 어머니의 가슴이었고 이야기를 만들어 주는 공장이었다. 그곳에서 울고 웃으며 어린 내 마음은 영글어갔다. 비행기가 날을 때면 내 꿈도 날았고, 남한강의 물결이 비행장 언저리를 매만질 때에 내 속에는 예쁜 꿈들이 싹터갔다.

나이가 들수록 그 자리가 그립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내 모습을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에게 예쁜 마음을 심고 싶다. 이 글을 읽으며 저만치 잊혀져 가던 추억의 장소를 찾아내는 그런 감격이 모두에게 있기를 기대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