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 면접에 합격한 아들은 곧장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엄마는 “공부하라”며 아들의 아르바이트를 말렸다. 아들은 ‘어려운 가정형편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기쁨이 앞섰다. 그러나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번이고 걸었지만 신호음만 되돌아왔다. 아들은 ‘오랜만에 나들이 간 부모가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고속도로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로 2명이 숨졌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때까지도 아들은 사고의 피해자가 자신의 부모인 줄 몰랐다.
경기 수원시 팔달구의 한 병원 장례식장. 검은 상복 차림의 이모 군(16)은 부모의 영정 앞에서 고개를 떨궜다. 옆에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여동생(12)이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남매의 부모는 하루 전 천안논산고속도로에서 발생한 고속버스 추돌사고로 숨졌다. 사고는 천안논산고속도로 하행선에서 일어났다. 서울을 떠나 전남 고흥으로 가던 고속버스가 앞서 서행하던 싼타페 승용차를 들이받은 것이다.
숨진 이 씨 부부는 2000년 결혼했다. 이 씨는 건설현장에서 전기설비담당 근로자로, 엄 씨는 7년째 피자가게 직원으로 일했다. 이 씨는 올 3월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내 엄 씨는 수년간 지병을 앓던 시아버지를 정성스럽게 보살폈다. 이 씨는 고생한 아내에게 둘만의 나들이를 약속했다. 이날 낮까지 일한 뒤 아들과 딸에게 “날이 좋아 여수에 바다 보러 다녀올게”라고 말한 뒤 집을 나섰다가 변을 당했다.
“이정필”, 나의 중학교 동창이다. 그는 보건소에서 근무하는 엄마와 단둘이 살았다. 보건소에 근무해서 그랬는지 평범한 엄마와는 포스가 달랐다. 세련되고 매너가 훌륭했다. 우리가 어울려 다니는 것을 보면 잔소리가 많으셨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혹 잘못 될까봐서 였던 것 같다. 그런데 정필의 삶에 반전이 일어났다. 고교에 진학할 때 쯤, 아버지가 나타난 것이다. 상세한 이야기는 생략을 하고 그의 부친은 상당한 고위공직자였다. 우리 모두는 입이 벌어졌다. 그때부터 친구의 삶이 달라졌다. ‘빽’이 통하는 시대인지라 친구는 전수학교에서 일반 고등학교로 전학을 했고, 나중에 군대생활도 황제처럼 했다.
거기까지가 내가 알고 있는 친구의 삶이었다. 그런데 30대 후반, 내가 목회를 하고 있던 교회에 “정필”이가 나타났다. 내가 그리 싫어하는 금목걸이를 하고 말이다. 그의 “썰”은 살아있었고, 덕분에 잊고 살았던 “양평중학교” 동창들을 만나 추억을 되새기는 귀한 시간을 함께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부유한 집 자녀들의 모습을 나는 그를 통해 볼 수 있었다. 목사인 나에게 태도는 각별했다. 친구가 목사라는 사실이 가슴이 ‘뿌듯’했던 듯싶다. 이상한 것은 가족을 소개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 날, 속내를 털어놓았다.
두 아들을 둔 자신이 지금 아내와 별거중이라는 것을. 돌발적으로 올라오는 감정을 참지 못하여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그 일 때문에 “아내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했다. 이후로도 종종 만나 우정을 나누며 상담형식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나는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 당시에 한국의 지역번호가 바뀌며 연락처가 흐트러지는 바람에 소식이 끊어져버렸다. 영주권이 나와 한국에 가자마자 친구를 찾았다. 아뿔싸! 이럴 수가?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몇 해 전,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 후였다. 너무도 아쉬웠다. 중간다리 역할을 하던 친구의 죽음으로 그렇게 중학 동창들의 소식은 묘연해져갔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은총이다. 주어진 하루를 그래서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리차드 백스터’는 말했다. “사람들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허겁지겁 살고 있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삶의 의미를 음미하며, 가을 끝자락 저만치 뒹굴며 떠나가는 낙엽의 이야기를 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