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이 단 이틀 남았다. 돌아보면 은혜요, 일체 감사뿐이다. 고마운 분들을 그리며 금년 마지막 칼럼을 쓰고 있다. 그때그때마다 다가와 위로해 주던 많은 사람들, 여전히 그 자리에서 사역에 힘을 실어주는 분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어린 시절에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세 들어 사는 주인집 아들이 늦깎이 장가를 갔다. 그래서인지 온 동네가 들떠있었다. 물론 전통혼례식이었고 밤이 되자 동네 아낙들이 우리 방으로 모여 들었다. 그러더니 불침번을 서듯이 드나들며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소위 “신방 엿보기”였다.
혼인 첫날밤에 신랑과 신부가 빚어내는 모습을 문 밖에서 문구멍을 뚫고 몰래 훔쳐보는 풍속이다. 지금은 큰일 날 일이지만 내가 어릴 때만해도 흔한 풍습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워낙 조혼이 성행하여 남자는 10살쯤, 여자는 14∼15살쯤 되면 혼인을 서둘렀다. 그러니 첫날밤에 많은 과오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신방을 지켜보게 된 것이 유래라고 한다. 호기심이 많던 그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엉뚱하게도 “빨리 커서 장가를 가야겠다.”였다. 그런데 세월의 흐름은 너무도 느렸다.
지금은 어떤가? 빠른 정도가 아니다. 어떻게 하루가 가고 달이가고 해가 바뀌는지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이다. 이제는 세월의 흐름이 무섭기까지 하다. 금년도 바쁘게 살았다. 밀알사역을 감당하고 미주 곳곳과 한국을 다니며 말씀을 증거하며 복음을 전했다. 그렇게 돌아쳐도 건강하니 감사하고, 어디를 가든지 반겨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사는 것이 행복하다. 사람은 누구나 유년기, 사춘기, 청년기를 거쳐 노년기로 넘어 가게 된다. 예수님도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탄생하셨다. 한해가 저물어가는 아쉬움 속에서도 예수님의 성탄이 있기에 신, 불신을 넘어서서 사람들은 기쁨을 안고 세월의 노를 젓고 있는 듯하다.
세대의 언덕을 넘어가는 것이 인생이다. 육신을 입고 태어난 사람은 과정을 거쳐 어른이 된다. 그 과정에서 실수와 넘어짐은 필수이다. 갓 태어난 아가를 안고 다니는 젊은 부부를 보면 ‘저 피덩이를 언제나 키우나?’ 탄식이 나오지만 남의 아기는 어느새 커버리는 신기한 장면을 목격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돌아보면 아쉬운 일들이 많은 한해였다. ‘조금 더 열심히 할걸, 조금 더 품어줄걸, 조금 더 아량과 여유를 가지고 살 걸’ 회한이 밀려온다.
고심하던 내 눈에 “나딘 스테어”(Nadine Stair)의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이란 시가 들어왔다.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이번에는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리라. 긴장을 풀고 몸을 부드럽게 하리라. 그리고 좀 더 우둔해지리라. 가급적 모든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보다 많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더 자주 여행을 하고 더 자주 석양을 구경하리라. 산에도 가고 강에서 수영도 즐기리라. 아이스크림도 많이 먹고 콩 요리는 덜 먹으리라. 실제적인 고통은 많이 겪게 되겠지만 상상 속의 고통은 가급적 피하리라.
보라, 나는 시간 시간을, 하루하루를 좀 더 의미 있고 분별 있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리라. 아, 나는 이미 많은 순간들을 맞았으나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면 그런 순간들을 좀더 많이 가지리라. 그리고 실제적인 순간들 외의 다른 무의미한 시간들을 갖지 않으려 애쓰리라. 오랜 세월을 앞에 두고 살아가는 대신에 오직 이 순간만을 즐기면서 살아가리라. 지금까지 난 체온계와 보온병, 레인코트, 우산이 없이는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이제 내가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이보다 한결 간소한 차림으로 여행길에 나서리라.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지내리라. 무도회장에도 자주 나가리라. 회전목마도 자주 타리라. 데이지 꽃도 더 많이 꺾으리라!> 이 시를 쓸 때 그녀의 나이는 85세였다. 나중 천국을 기대하기보다 가까이 있는 나 자신의 오늘을 기대하며 멋지게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Happy New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