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모두 옷을 입는다. 아침에 샤워를 마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무슨 옷을 입고 나갈까?’를 고민한다. 여성들은 남성들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옷에 예민하다. 옷 입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성향과 추구하는 삶의 방향을 엿볼 수 있다. 옷은 경제상황까지도 드러낸다. 확실히 GNP가 높은 나라는 복장부터 티가 난다. 경제가 어려운 나라 사람들은 옷차림이 남루하다. 옷은 사람의 피부를 보호해 주는 역할이상으로 많은 복선을 깔고 인류와 함께 해 왔다.
원색을 즐겨 착용하는 사람은 매사에 적극적이고 자신만만하다. 수수한 옷차림을 즐겨하는 사람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내면을 다지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남성들의 의복은 대개 검은 계통이 일반적인 반면 여성들의 의복은 계절과 시대를 따라 변화무쌍하게 길이와 색상을 달리한다. 봄은 여성의 옷으로부터 찾아온다는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여자의 옷은 제2의 자아이다. 옷장 속의 옷들은 여자의 무의식을 반영한다고 한다.
옷은 신분을 나타내 주는 역할을 한다. 신부는 항상 수단, 사제복을 입는다. 스님도 회색계통의 승복을 입는다. 목사는 때로 로만칼라를 착용한다. 흰 목띠 형태로 깃이 없는 셔츠에 부착하는 옷이다. 하지만 나는 한번도 입어본 적이 없다. 감리교회나 루터란 계통의 목사들은 즐겨 입는 듯하다. 군인은 군복을, 경찰은 경찰복을, 승무원들은 기차, 선박, 항공기 등 교통 기관에서 근무할 때 반드시 제복을 입는다. 학생은 교복을 착용해야 하며, 검찰 계통의 근무하는 분들은 직분에 따라 옷 모양이 다르다.
내가 어린 시절에 입고 싶었던 것은 보이스카웃 복장이었다. 하지만 몸이 불편한 나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고교 시절에는 교련복을 입고 싶었지만 그 시간만 되면 교실을 지켜야 하는 나에게는 전혀 소용이 없는 옷이었다. 양평군내 중학교 대항 체육대회가 열리면 제일 먼저 입장하며 분위기를 돋운 것은 여중 브라스밴드 악단이었다. 열을 지어 멋진 유니폼에 일사불란하게 드럼은 두드리는 여자애들은 우리의 가슴을 달뜨게 했다. 정말 멋이 있었다.
제복을 착용하던 사람이 그 옷을 벗으면 평범해 지는 것을 아는가? 88올림픽이 가까워오며 군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를 시도한다. 올림픽에 참석하는 세계 선수들 뿐 아니라 관광객들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기 위해 검문소에서 근무하는 헌병들의 제복을 벗겨낸 것이다. 커다란 기럭지의 헌병이 지나가는 버스를 세우고 검문하던 모습을 우리 세대는 기억한다. 살짝 가리워진 철모 밑으로 날카로운 눈매를 보이며 구슬 굴리는 소리를 내는 워커를 신고 승객들을 훑으며 검문을 하는 모습에 차내 분위기는 살벌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제복을 벗은 헌병은 전혀 권위가 없었다. 미안한 표현으로 마치 방위병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낼 뿐 아니라 삶의 태도도 결정한다. 양복을 입고 다닐 때와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었을 때에 마음가짐은 차이가 난다. 나는 목사이다. 목사는 타종교의 성직자처럼 특별한 제복이 없다. 하지만 목사안수를 받는 그 순간부터 목사로 살아야 한다. 글을 쓰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목사라는 옷을 벗어도 거룩하게 살 수 있을까?’ 목사도 사람이다. 사람들은 목사는 전혀 죄성이 없는 사람으로 오해한다. 아니 전혀 죄와는 관계없는 사람으로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똑같다. 나도 일탈하고 싶은 욕망을 느낄 때가 있다.
스트레스 해소라는 핑계로 보통 사람들이 하는 짓(?)을 하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목사라는 이 옷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 목사라는 아름다운 멍에가 나를 목사답게 살도록 인도해 주었다. 목사이기에 목사처럼 살 수밖에 없는 아니, 목사로 살아야 하는 내 삶이 그래서 소중하다. 만약 내가 목사가 아니었다면 내 신앙과 인격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자신이 없다. 목사이기에 목사라는 옷을 입고 있는 내 생애동안 목사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것이 그래서 대견하며 다행스럽고 기쁘다. 그래서 직분이 중요하고 옷이 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