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웨이에 차량들이 제 속도를 내며 원활하게 소통될 때 시원함을 느낀다. 누구와 하며 공감대를 느낄때에 통쾌함을 느낀다. 야구 경기의 흐름이 빨라지면 흥미진진함을 느낀다. 드라마를 볼 때도 스토리를 신속하게 풀어나가는 작가를 사람들은 좋아한다. 그러나 하이웨이에 공사를 하거나, 사고가 나서 차량들이 거북이 운행을 해야 할 때 답답함을 느낀다. 대화를 나눌 때도 상대방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데다 자신의 이야기만 반복 할 때 시계 바늘이 멈춰진듯한 지루함을 느낀다.
인생을 살다 보면 정말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이다. 어느 순간 삶이 이해되지 않고 그분이 아주 멀리 계시는듯한 적막함을 느낄 때 사람들은 좌절하기 시작한다. 상황이 어려워도 좋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삶이 나를 속여도 좋다. 그분이 내 곁에 계시다는 것이 느껴지고 믿어 질 때 우리는 모든 고난을 견뎌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몸부림치며 기도를 드려도 그분이 침묵하실 때가 있다. 그때 사람들은 하나둘 스러져간다.
초신자 때는 기도 응답을 신기하게도 잘 받는다. 어떨 때는 생각 만해도 그분은 주신다. 그래서 누구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며 행복 해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고난>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다. 고난도 어느 정도여야지 극한 고난이 오면 기도도 안 나온다. 찬송은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를 반복하며 신음소리만 낼 뿐이다. 고난당하는 이유라도 알았으면 좋으련만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그분은 계속 침묵하신다.
침묵 속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이다. 모세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그는 공주의 아들로 자라나 이집트 문명을 섭렵(涉獵)하여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엄청난 권세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켜 보려 했다. 그러나 살인자가 되어 쫓겨 가다가 미디안 광야의 양치기가 된다. 모세는 하나님의 숨결을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 40년을 미디안에 파묻혀 살아야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엄청난 생의 충격을 경험한다.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가 참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고 그는 아라비아 광야에서 깊은 기도에 몰입한다. 3년이란 세월을 그는 하나님의 침묵을 감당 해야만 했다. 그 침묵 속에서 공통적으로 경험한 것은 믿음의 성장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지만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고 엄청난 믿음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 무서운 침묵을 견뎌 낸 사람은 어떤 영광이 주어져도 교만하지 않는다. 아니 교만 할 수가 없다. 또 하나 신비스러운 것은 하나님은 그 침묵을 견뎌낸 만큼 쓰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무한정 침묵하시지는 않는다. 때가 있다. 기한이 있다. 그분이 정해 놓으신 그 분량만큼 당도하기를 애타게 바라보시며 침묵하신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연단의 분량이 있다. 그것이 차기까지 그분은 냉정하리만큼 침묵하신다.
어두운 밤이 지나고 나면 찬란한 새벽이 오고, 추운 겨울이 지나면 따스한 봄날이 오듯이 하나님의 침묵이 풀리는 날- 그분은 해맑은 미소를 머금으시고 우리 곁에 다가오신다. “잘 견뎌주었구나, 잘 참아주었구나! 그동안 섭섭했지? 지금까지 난 널 바라보고 있었단다. 나는 널 영원히 사랑한단다” 말씀하신다. 항상 잘되는 것만이 복이 아니다. 넘어진다고 실패가 아니다. 그분의 마음을 알아야한다. 그분의 갈망을 알아야 한다. 그분이 왜 침묵하시는지를 깨달아야한다.
지금, 가슴이 녹아내리는 듯한 고통을 당하는 분이 있을 것이다. 해결되지 않은 숙제를 끌어안고 오랜 날 한숨지으며 사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어야한다. 나사로가 죽어 썩은 뒤에야 일으키신 것처럼 우리가 다 끝났다고 생각 할 때, 다 포기한 그때에 그분은 능력의 손길을 내어 미신다. 그분의 침묵이 끝나는 날, 시온의 대로가 열릴 것이다. 지금 감사하며 하나님의 침묵을 감당해 내기를 기도하며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