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시골에서 살았다. 여름 이맘때가 되면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졌다. 밤새 공포에 떨다가 날이 밝고 화창해진 아침, 들녘에 나가보면 곡식들이 내 키만큼 자라나 있는 것을 발견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번개가 치면 하늘에서 수은이 쏟아지며 식물의 성장을 돕는다고 한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때로는 천둥번개 치는 밤처럼 견디기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할 때가 있지만 그 고비를 넘어서면 한 뼘씩 자라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돌아보면 삶의 고비가 많았다. 신앙을 가지게 해 준 본 교회를 떠나 교육전도사 자리를 알아보았으나 쉽게 사역의 길은 열리지 않았다. 장애를 가진 신학생을 스스럼없이 받아주는 목사와 교회는 없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고 넉넉한 환경의 교회에서 성장하기를 기대하며 본 교회를 떠났건만 아무 곳도 나를 불러주지 않았다. 그 시간이 일 년을 넘어서며 지치기 시작했다. 소명감까지 희석되어지며 포기라는 글자가 내 앞에 어른거렸다.
나이 서른이 다되어가도 나는 여전히 혼자였다. 신학대학원 3년 동안 동료들은 하나둘 결혼을 하며 가정을 꾸며갔다. 나는 그 누구도 사랑할 여유도 환경도 조성되질 않았다. 그때 동요 ‘개구리노총각’의 가사가 자꾸 맴돌았다. “♬삼십이 다되도록 장가를 못가 안간건지 못간건지 나도 몰라 몰라 몰라” 가장 친한 친구가 갑자기 결혼 발표를 했을 때 뜻 모를 배신감에 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몸이 건강한 사람의 결혼이 늦어지는 것은 흠이 되지 않는다. 장애를 가진 나에게는 결혼의 중압감이 점점 더해갔다.
그런데 어느 날, 귀한 교회 중 · 고등부 교육전도사 책무가 주어졌다. 좋았다. 행복했다. 정말 열심히 했다. 그토록 갈망하던 일이었기에 특유의 열정을 불살랐다. 30살 가을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매를 만나 뜨겁게 연애를 하고 이듬해 봄에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의 풋풋함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삶의 에너지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기다리면 된다는 것을. 쉼표 없이 계속 달렸다면 더 깊은 수렁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쉽게 결혼을 했다면 귀한 줄을 몰랐을 수도 있다. 그 고비를 넘어가며 내 신앙도 인격도 한 뼘씩 자라난 것을 깊이 깨닫는다.
살아야 한다. 살아 있는 한 희망의 꽃은 핀다. 힘들다고 생각하는 순간, 기회는 다시 찾아온다. 헤밍웨이는 “세상은 우리 모두를 파괴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많은 사람들이 그 폐허 속에서 더욱 강하게 성장한다.”고 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라도 거대한 폭풍을 한번쯤 만나게 된다. ‘폭풍에 휩쓸려 가느냐? 폭풍을 이용해 앞으로 더 빨리 전진하느냐?’는 나의 몫이다.
인생에 닥친 시련을 받아들이고, 딛고 일어서면 오히려 새로운 삶, 새로운 꿈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내 앞을 가로막고 나를 주저앉히는 것을 장벽이 아닌 도약의 발판으로 활용한다면 지금의 인생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말이다. 건강한 사람은 장애의 아픔을 모른다. 장애를 가지고 한평생을 산다는 것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하지만 그 장애로 인하여 겸손할 수밖에 없고 오직 기도와 신앙에 전념해 온 삶이 축복인 것을 이제는 당당히 고백할 수 있다.
사람들은 오늘 내가 당하는 고통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돌아보면 처절하게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 사람이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오늘 ‘밀가루 알러지’로 고통 받는 사람을 만났다. 세상에! 그분이 말하기를 ‘형광등알러지’도 있단다. 내게 주어진 것을 축복으로 아는 사람이 대인이다. 길거리를 떠돌던 노숙자 카디자 윌리엄스는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공부를 하면 꿈을 이루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열심히 노력해 하버드대학교 학생이 되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시련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삶은 죽을 만큼 괴롭지만 살아갈 만큼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