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성탄을 지나 2018년의 끝이 보인다. 기대감을 안고 출발한 금년이 이제는 과거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지난 토요일(22일) 첼튼햄 한아름마트 앞에서 구세군남비 모금을 위한 자그마한 단독콘서트를 가졌다. 내가 가진 기타는 12줄이다. 마치 두 대의 기타가 함께하는 것처럼 소리가 웅장하고 청아하다. 크리스마스 캐롤을 시작으로 찬송과 복음성가로 옮겨가다가 청년시절 즐겨 부르던 포크송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장장 5시간동안 공연을 펼쳤다. 마트를 들어서던 지인들이 깜짝 놀라 다가선다. “아니, 목사님, 이런 것도 하세요? 구세군으로 오셨어요?” 이내 이유를 알고 냄비 속에 정성어린 성금을 넣어준다. 그 모습이 정감 넘치고 고맙기 그지없다. 이 귀한 사역에 동참한지도 어느새 10년을 넘어서고 있다.
성탄절이 한해의 끝자락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다. 해가 바뀌는 길목에서 누구나 원인모를 서러움에 사로잡힐 수 있건만 성탄이 있기에 사람들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희망으로 새해를 바라보게 되는 것 같다. 성탄절이 다가올 때마다 기억나는 것은 아스라이 스쳐가는 새벽송이다. 중 · 고등부 전도사 시절부터 나는 새벽 송을 이끄는 선발대에 서야했다.
그 시절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전교인이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기관별로 발표회를 가졌다. 앳된 영 · 유아부 아가들의 재롱잔치로부터 성극이 이어지고 성가대의 칸타타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행사가 끝나면 기관별로 선물교환 시간을 가진다. 그렇게 밤이 깊어가고 자정 무렵 떡국 한 그릇을 먹은 후 새벽송이 시작되었다. 장년, 청년을 중심으로 간간히 학생들이 섞여 팀을 짜고 지역별로 분산되어 가가호호 방문하며 새벽송을 돌았다.
맨 앞에는 새벽송 대원임을 알리는 창호지에 빨간 십자가를 그린 청사초롱이 자리했다. 성도 집에 도착하면 찬송을 부른다. “고요한밤 거룩한밤, 그 어린 주예수, 기쁘다 구주오셨네, 저들밖에 한밤중에” 4곡 중 그때그때마다 2곡을 선정하여 불렀다. 찬송이 시작되면 배시시 문이 열리고 눈을 비비며 나와 함께 서서 합창을 했다. 찬송이 끝나면 “메리 크리스마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외친다. 그리고는 내어 민 쌀 포대자루에 차곡차곡 선물이 채워진다. 점점 무거워지는 선물보따리를 지고 따라오던 어린 남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대개 쵸코파이, 과자 사탕종류가 주를 이뤘다. 무거워도 선물 자루를 지는 짐꾼들(?)의 모습은 행복했다. 모아진 선물은 가까운 곳에 있는 고아원이나 어려운 사정의 이웃들에게 배부되어졌다. 그런데 이제 그 새벽송이 서서히 사라져간다. GNP가 올라가고 경제수준이 높아지며 개인주의에 익숙해져가는 세태에서 새벽에 집집을 오가며 부르는 새벽송을 소음으로 간주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70년대에는 새벽이면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땡그랑 땡그랑” 이후에는 차임벨로 바뀌더니 이제는 새벽종소리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이다.
무엇보다 새벽송이 사라진 것은 아쉽기 그지없다. 한국 전역이 도시화되면서 이제 새벽송은 설자리가 없게 된 것이다. 주거 환경이 아파트로 변하다 보니 불편하기도 하고 신앙이 없는 분들이 소음으로 신고하는 사태가 빈번해 지면서 슬그머니 새벽송 전통이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성탄의 아름다운 추억들도 하나둘 지워져갔다. 새벽송은 오래 되어 겉장이 떨어져 나간 그림책이나 색갈이 바래 누렇게 변해버린 이야기책 안에서만 숨죽이고 있는 것이다.
풍족하지 않았지만 그 시절에는 새벽송이 있었기에 크리스마스가 모든 사람들에게 정겹게 다가갔었다. 가난하고 삶의 환경도 누추했지만 그 당시의 성도들의 마음만은 그래서 부요했었다. 작은 것을 나누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감사가 넘쳤다. 새벽송을 돌며 코끝에 마주치던 차가운 공기는 마치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 틈에 자던 목자들이 느꼈던 공기와도 같았다. 성탄의 계절에 그 때 그 시절의 새벽송을 그리워해 본다. “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