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전능하시며(omnipotent), 전지하시며(omniscient), 무소부재하시며(omnipresent), 선하신(good) 분이다. 삶에 나타나는 일은 우연이 없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들(attributes)과 역사(work)가 사실이라면 수 많은 사람들이 입는 장애, 역시 하나님의 뜻 밖에서 발생되는 일일 수 없다.
성경 요한복음 9장에서 선천적 시각장애인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태도에서 그 당시 사회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다. 장애는 죄 때문에 온 것일까? 장애인들은 다 벌을 받은 존재들인가?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부모의 죄나 그 자신의 죄가 아닌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장애를 입었다”는 것이다. 시각 차이가 극명하게 갈린다.
세상에는 왜 죄와 불행이 있을까? 신정론(theodicy) 문제가 대두된다. 신정론에 관한 통상적인 답 중 하나는 “하나님이 그냥 지나치도록 내버려 두셨다”(간과)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겪는 불행을 하나님도 안타까워하신다는 부연 설명도 잇따른다. 또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힘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자칫 죄와 불행은 하나님의 능력과 뜻밖에서 발생될 수 있다는 식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하나님은 장애를 우연에 맡기지 않으셨다. 장애는 액운이 다스리고 건강은 선이 다스리는 것도 아니다. 장애를 죄악으로 연결하는 것은 무지한 처사이지만 건강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하는 것도 의미가 같다.
이런저런 평이 오가다가 결국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짓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지도 모른다. 명확해 보이지만 어딘지 궁색해 보인다. 혹자는 인내하고 견디면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고 말한다. 장애와 같은 불행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혹자는 운이 없으면 미연의 방지가 늦어 장애를 입고 태어날 수도 있고, 재수가 없으면 교통사고로 평생 장애를 입고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향이든 하나님의 섭리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다. 우리는 세상의 어떤 사실이나 사건도 중립적(neutral) 관점에서 이해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단지 보이는 것들의 창조주만은 아니시다.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주관하신다. 육적인 것만 아니라 지식이나 감성이나 영적 세계의 일도 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어떤 지적, 정신적, 감성적 활동도 하나님 없이는 불가능하다. 매일 태양이 떠오르는 사실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은 오직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률성(uniformity) 때문에 가능하다. 주요 관심은 장애 자체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으로 나타나야 하는가에 맞추어야 한다. 그렇다고 장애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장애가 하나님 뜻 가운데서 발생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만큼 비참한 일도 없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불행이 나에게 발생되었다는 것처럼 외로운 일은 없다.
내 삶이, 내 행복이 아무도 모르고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소위 우연(chance)이나 운명(fate)에 달려 있다고 하면 그것만큼 불안한 일은 없을 것이다. 비록 누구도 원하는 일이 아니지만 장애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발생된 일이어야 오히려 희망이 있고 의미가 있게 된다.
장애가 하나님의 뜻 밖에서 발생 된 일이라고 하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다. 장애를 입은 사람은 원망할 대상도 가질 수 없고, 장애로 인한 아픔과 괴로움도 의미 없게 된다. 결국 공허와 원망과 분노만 있을 것이다.
내가 생후 두 살에 소아마비에 걸려 장애인이 된 것, 장애를 껴안고 힘겹게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결국 그분의 은총이요, 깊은 사랑임을 깨닫는 것이 장애를 넘어서는 소중한 단계가 되는 것이다. 삶은 해석이다. 밀알선교단은 장애를 입은 분들의 시각을 바꾸어주고, 장애인은 틀린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며, 나아가 특별한 계획 속에 보내진 존재임을 인식시키는 사명을 새해에도 묵묵히 감당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