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의 틀을 깨라! 4/17/2015

by admin posted Nov 2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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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는다. 집안에서부터 자라나며 교육기관에서 다양한 훈련과 지식을 터득하며 성장한다. 그 모든 교육을 받고나면 의젓한 사회인이 되는 혜택(?)도 있지만 반면 “당연한” 인물이 된다. 지식이 충만해지며 ‘당연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고가 형성된다. 평생 당연한 인물로 살아가는 것이 이상적이 삶처럼 길들여진다. 사실 당연은 객관적인 단어이면서도 지극히 주관적이다. 세태가 천천히 변해갔다면 당연도 그 속도를 맞추어 주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속도가 워낙 빠르다보니 당연이 따라잡지를 못한다. 사실 현대에서 가장 무서운 싸움은 당연과의 대립인지도 모른다.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는 세계가 있다. 그것을 당연의 세계라고 하자. 태양은 떠올라야 하고 당연히 날은 밝아져야 한다. 새들이 지저귀어야 하고 사람들은 활동을 시작해야 한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거기에 있다. 당연한 세계는 무엇이든 거기에, 그렇게 있어야만 한다. 내가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처럼 모든 사물도, 아니 사람들도 거기에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역사는 당연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에 의해서 변화되거나 발전되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의 세계에 과감히 도전한 사람들에 의해 역사는 갈등하며 변혁되고 발전되어 왔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미제(Made U.S.A.)>가 최고였다. 미제 연필 하나만 가져도 반분위기를 주도할 만큼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있었다.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는 전자제품하면 “Sony”였다. <일제(日製)>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제품을 가진 사람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워낙 우리나라가 낙후되어 있어서인지? 아니면 약소민족의 사대주의 사상 때문이었는지 우리 민족은 누구를 막론하고 “외제”를 선망했다. 우리세대에 유행하던 말은 “이게 이래뵈도 물 건너 온거야!”였다.

그런데 그 틀이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별 볼일 없던 대한민국 제품이 세계를 점령해 가고 있다.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핸드폰의 대부분이 <Samsung>이다. 호텔이나 병원에 가서 TV 상품을 들여다보라! 거의 <Samsung> 아니면 <LG> 마크가 찍혀있다. 운전하며 만나는 차량 중에 한국 차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을까? “당연”이라는 과제 앞에 도전해 온 사람들에 의해 홍해가 갈라지는 대역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왜, 맨날, 당연히, 거기에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부터 삶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당연의 세계는 거기에 너무도 당연히 있어서 그 두꺼운 껍질을 벗겨보지도 못하고 당연히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면 당연의 세계는 누가 만들었을까? 물론 당연히 당연한 사람이 만들었다. 당연히 그것을 만들 만한 사람, 그것을 만들어도 당연한 사람, 그러므로 당연의 세계는 물론 옳다. 당연은 언제나 물론 옳기 때문에 당연의 세계의 껍질을 벗기려다가는 물론의 손에 맞고 쫓겨나고 만다.

당연의 손은 보이지 않는 손이면서 왜 그렇게 당연한 물론의 손일까? 당연한 세계에서 나만 당연하지 못하여 당연의 세계가 항상 낯선 나는 물론의, 세계의 말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 물론의 세계가 나를 좋아할 리 만무하다. 당연의 세계는 물론의 세계를 길들이고 물론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를 길들이고 있다. 당연의 세계에 소송을 걸어라! 물론의 세계에 도전해야 한다. 나날이 다가오는 모래의 점령군, 하루 종일 발이 푹푹 빠지는 당연의 세계에 대하여 과감히 도전하는 사람은 역사를 창조한다. 그 민족은 세계역사를 주도한다.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힘들어도 해야 하는 것이 당연과의 싸움인 것이다. 물론의 모래가 당연이라는 콘크리트로 굳기 전에 틀을 깨야만 한다. 그 틀을 깨고 새로운 발상과 시도를 전개하는 사람을 선구자라고 한다. 자, 우리가 깨어야 할 “당연”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