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아오며 가장 많이 해 온 것이 가위 바위 보일 것이다. 누가 어떤 제의를 해오던 “그럼 가위 바위 보로 결정하자”고 손을 내어민다. 내기를 하거나 순서를 정할 때에도 사람들은 손가락을 내어 밀어 가위 바위 보를 한다. 모두를 승복하게 만드는 방법 중에 이것처럼 쉽고 간편한 방법도 없을 것 같다. 연인끼리 가위 바위 보를 하며 정겹게 계단 오르내리기를 한다. 아카시아 잎을 따 손에 쥐고 가위 바위 보를 하고 훑어내는 게임도 많이 해 보았다.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두 손을 모아 똬리를 틀어 들여다보며 자기가 내어 밀 손가락 모양을 결정하지만 사실 신통한 방법은 없다.
우리가 어릴 때는 ‘가위 · 바위 · 보’보다는 “짱껨뽀”를 더 많이 외쳤다. 이 ‘짱껨뽀’는 본래 중국말 ‘란쩡펑’에서 나온 것으로 발음이 와전되어 ‘짱껨뽀’가 된 것이다. 가위와 종이가 보편화된 5세기 중국에서 아이들 손 놀이로 시작됐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또 쥐(가위), 호랑이(주먹), 코끼리(보)를 상징하는 놀이로 그 이전부터 인도에서 행해졌다는 설도 있다. 유럽에는 17세기에 전해졌고 우리나라엔 일제강점기 일본을 통해 소개됐다. 아동문학가 윤석중이 ‘짱껨뽀’ 대신 가위 바위 보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이제 ‘짱껨뽀’란 말은 지금은 중장년층의 기억 속에나 있을 뿐이다.
갑자기 가위 · 바위 · 보가 떠올랐다. 그러면서 인생은 어쩌면 가위 바위 보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생에 대한 명언이 많기도 많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생떽쥐베리. 물 한 모금 얻기도 힘들 것 사막에도 반드시 오아시스는 있다는 의미이다. 때로는 내 인생이 사막처럼 온통 모래만 보이고 꼬이는 것 같아도 인내하며 살다보면 언젠가 콸콸 솟아나는 샘물을 발견할 날이 오고야 만다는 것이다.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그러나 우리는 닫혀진 문을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 헬렌켈러. 그녀는 삼중고의 장애를 가진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눈도 안보이고, 듣지 못할 뿐 아니라 말조차 하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이었다. 그러나 헬렌켈러는 누구보다 위대하고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았다. 그녀가 외친 말이기에 설득력이 크게 느껴진다. “작은 기회로부터 종종 위대한 업적이 시작된다.”-데모스테네스. 인생의 성공은 한방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게 주어진 지금 작은 기회들을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성공의 지름길이 열리는 것이다.
이러한 고상한 명언을 뒤로하고 나는 “인생은 가위 · 바위 · 보”라고 외치고 싶다. 가위는 보를 이기지만 바위에게는 진다. 바위는 가위를 이기지만 보에게는 안 된다. 보는 바위를 이기지만 가위를 만나면 패배하고 만다. 인생이 그런 것 같다.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패배자도 없다. 한 남자가 예쁜 여자를 보고 어렵게 청혼해서 결혼을 했다. 그런데 얼굴은 눈이 부시리 만큼 예쁘고 아름다운데, 살아보니까 너무너무 게을렀다. 견디다 못한 남자는 이혼을 하고 아주 부지런한 여자와 결혼을 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입 까지 너무너무 부지런했다. 얼마나 말이 많은지 일년 365일을 쉬지 않고 말을 해댔다. “아이쿠, 내가 저걸 못 봤구나!” 그래서 또다시 이혼을 하고 말수가 적은 여자와 결혼을 한다. 그 여자는 말이 없는 건 좋은데, 너무나 사치스러웠다. 끝에 가서 남자는 이런 말을 했단다. “여러 여자와 살아보았지만 결국 ‘인생은 가위 바위 보’더라.”
가위 바위 보는 이기기만 하거나 지기만 하는 경우는 없다. 인생도 그렇다. 이기고 형통한 날도 있지만 패배하여 눈물지으며 곤고한 날을 살아야 할 때도 있다. 이겼을 때에 자만하지 말고 졌다고 낙망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는 지혜와 인내가 필요하다. 돌고 도는 인생의 법칙을 가슴으로 습득하며 초연해 지는 사람만이 인생의 참맛을 알고 행복을 거머쥐게 될 것이다. 가위, 바위,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