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가정의 달이요, 5일은 어린이 날이다. “어린이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어린이날은 왠지 모든 면에서 너그러웠기 때문이다. 어른들도 야단치는 것을 그날만은 자제하는 듯 했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어린이날은 우리에게 꿈을 주는 희망의 날이었다. 그럼 “어린이”는 무슨 뜻일까? 풀어 쓰면 “어린 하나의 사람(인격체)”이 된다. 어리지만 인격적으로 대우를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이다. 사실 아이들이 무시당하며 산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예수님 당시 까지만 해도 아이들은 수(數)에 넣지를 않았다.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해 맑게 자라나야 할 인격체가 채 피어나지도 못하고 꺾여간 예는 너무도 많다.
그런 아이들에게 “어린이”라는 국어사전에도 없던 명칭을 붙이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분이 있다. 바로 소파 방정환 선생이다. 소파 방정환 선생은 우리나라 소년운동과 아동문학의 선구자이다. 그는 서울 태생으로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난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살림이 얼마나 어려웠던지 12살 누나를 시집보내야 할 형편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가난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가난하고 슬픈 아이가 어찌 나 뿐이랴. 우리도 뜻을 모아 내일을 향한 일꾼이 되어야 한다.”며 동네 아이들을 모아 '소년 입지회'를 조직, 모임의 회장을 맡았다. 1920년 8월 25일 선생은 '개벽 3호'에 번역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함으로써, 이 땅에 처음으로 『어린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1923년 3월 1일, 그의 소년운동과 아동문학의 결정체인 소년잡지 월간 '어린이'가 창간되었으니 바로 색동회 창립 직전의 일이다.
이 시간 새로운 의미의 조명을 하고자 한다. 어린이는 얼인이다. “얼인!”- ‘얼의 사람, 얼의 덩어리’라는 말이다. 심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학설이 있다. 그 사람의 인격은 태어나서 만 6세까지의 경험을 통해서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의 얼은 해맑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꼽으라면 으뜸이 어린 아이의 웃는 모습일 것이다. 그것은 동서양, 인종을 초월하여 차이가 없다. 아이들은 태어 날 때 하나님의 얼을 안고 세상에 나온다. 그래서 아이를 만나면 누구나 넉넉해지고 마음이 너그러워 지는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교회에서는 주일학교 반사직을 맡겼다. 솔직히 신앙 지식이나 영적 능력도 없는 나였다. 믿음이라기보다 그냥 호기심과 특유의 열정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때 나는 아이들의 눈동자가 얼마나 맑은지를 볼 수 있었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들을(안드레 반) 가르치며 그들의 청순한 눈동자 앞에 떳떳이 서기 위해 기도를 시작했고, 진실한 모습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것이 나의 영성을 새롭게 하기 위한 기초 단계였고, 그 영성이 쌓여 목사까지 되었는지도 모른다. 지나보면 이제는 50대가 가까워졌을 그 아이들이 나의 스승이요 나의 얼이었다. 그래서 감히 말한다. 어린이는 “얼인”이라고.
얼이 무엇인가? 얼은 생명이요, 정신이요, 영이다. 얼의 특징은 자유다. 걸리는 것이 없고 막히는 것이 없다. 어린이들은 나라도, 전통도, 도덕도, 법도, 체면도 없다. 있다면 순진뿐이다. 얼인이는 있는 자유를 그대로 산다. 얼인이는 철저하게 지금을 산다. 그러나 어른들을 보라! 과거에 상처 때문에 힘들어 하고, 과거에 아픈 기억에 에너지를 빼앗기며 산다. 그러나 얼인이는 오늘을 산다. 그들은 울다가도 금방 웃는다. 지금을 살기에.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핵심은 돌이키는 것이다. 이 "돌이켜"가 삶의 예술이라면 예술이다.
산다는 것은 바로 돌이켜 어린이가 되는 것이다. 어린이가 된다는 것은 얼인,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愛氣(애기)가 되는 것이다. 하늘나라에는 이렇게 돌이켜 어린이가 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예수님은 영원한 얼인이, 어린이로 있고, 또 있게 하시는 분이다. 얼인이의 날, 바로 ‘내 안에 숨어 있는 얼을 만나고 어린이가 되어야 겠다.’고 마음먹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