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보여서 봄이다. 겨울의 음산한 기운에 모든 것이 눌려 있다가 대기에 따스한 입김이 불기 시작하면 곳곳에서 생명이 움트기 시작한다. 숨어있던 모든 것들이 서서히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실로 봄은 모든 것을 보게 한다. 아지랑이의 어른거름이 아름답고, 버들강아지의 연한 순이 가슴을 달뜨게 한다. 얼음장 밑으로 가냘픈 소리를 내며 흐르던 시냇물이 이제는 청아한 소리를 내며 자갈을 힘차게 핥는다. 계곡의 눈이 녹아 파란 녹수로 변해 흐르고, 온갖 아름다운 새가 나래를 활짝 펴고 산봉우리를 넘나든다. 아무 목적도 없이 저만치 보이는 산등성을 넘어가보면 무엇인가 신기하게 다가올 것만 같다.
하지만 봄은 너무도 짧다. 그래서 봄은 청춘에 비유되는가보다. 스물인가 했더니 서른 즈음이다. 누군가 나에게 “20대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립기는 하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신학을 공부하기 전과 후로 내 청춘의 봄날은 갈라진다. 그렇게 기르고 싶었던 장발, 마음껏 피우고 싶었던 담배, 누구의 간섭도 없이 마셔보고 싶었던 술. 거기에 통기타가 더해지며 청춘의 봄은 깊어갔다. 하지만 그분의 강력한 손길이 나를 성직으로 끌어 잡아당기면서 내 청춘의 방종은 끝이 났다. ‘거룩’이라는 멍에에 휩싸여 화려하던 봄날은 그렇게 내게서 떠나갔다.
<봄날은 간다>라는 명가요가 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들던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백설희씨의 청아하면서도 흐느끼는 듯한 음조를 흉내 내는 일이 쉽지 않을뿐더러, 노래가 전하려는 사랑을 잃은 여자의 속절없는 마음도 그 나이에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노래를 장사익이 리메이크하여 불러댈 때에 중년이 된 내 가슴에 비로소 파고들어왔다. 한이 서린 장사익의 창법에 이 노래는 새 옷을 입은 것이다.
노래 제목을 끌어다 붙인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는 새로운 충격이었다. 산소 같은 여자 이영애와 어수룩해 보이지만 지적인상이 강한 유지태의 순수한 만남은 영화를 봄날로 끌어간다. 주인공인 순결한 청년은 ‘가만히 눈감으면 잡힐 것 같은 것들이 항상 잡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아름답고 거룩하게 여겨야 할 것이라도 이 세상에서의 그 실현을 곧바로 보장해 주는 힘이 되는 것은 아니다. 봄은 결국 성장통을 의미하며 다가선다. 봄이 없이는 여름을 맞이할 수 없다. 아픈 만큼 성숙해 지는 것을 지나간 다음에야 깨닫는다. 봄은 짧지만 봄의 아픔이 싱그러운 여름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 시인 T. S. 엘리엇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읇었는지 모른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명대사는 “라면 먹고 갈래?”이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고 청순한 이영애가 진한 러브신을 연출한다. 지금도 젊은이들 사이에는 사랑을 나누자는 은어로 이 말이 사용되고 있다. 한 겨울에 만난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는 봄이 되면서 서로에 대한 사랑을 느끼지만 여름이 되자 사랑의 순간들은 모두 빛바랜 사진처럼 조각나버리고 만다. 봄은 짧지만 봄날은 허망하게 가지 않는다. 삶은 다 다르지만 알뜰한 맹세에, 실없는 기약에, 얄궂은 노래에 봄날이 가듯 어떤 인생도 흘러간다. 누구의 봄도 머물지 않는다. 열아홉 시절이 황혼 속에 슬퍼지는 건 황혼이 되어서야 열아홉이 절정이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 사라질 때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봄이 왔을 때가 아니라 봄이 갈 때 봄을 생각한다.
어느새 봄이 가고 있다. 이제 땀샘을 자극하는 여름이 다가올 것이다. 삶은 봄이 아니라, 봄이 가는 것을 아는 것이고, 그걸 노래할 줄 아는 것이다. 인생은 모래가 손 안에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허무와 희열을 겸하며 간다. 그렇게 계절의 봄도, 내 청춘의 봄날도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