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지인에게 전화를 할라치면 반드시 체크하는 것이 있다. ‘지금, 한국은 몇시지?’ 시차이다. 같은 지구별에 사는데 미국과 한국과는 13시간이라는 차이가 난다. 여기는 밤인데 한국은 대낮이고, 한창 활동하는 낮이면 반대로 한국은 한밤중이다. 시차를 계산하고 그 사람이 전화를 편히 받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기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세계를 두루 다니며 깨닫는 한 가지가 있다. 결코 치우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편협은 위험하다. 나라 간에만 시차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에도 시차가 있다. 내가 이만큼 생각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그런 방향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럴 때는 기다려줘야 한다. 사람끼리는 생각의 시차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 이래서 중요하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있다. 만나기가 부담스럽고 꺼려지는 사람이 있는가? 가만히 관점을 바꿔보면 그 사람의 장점이 슬며시 드러난다. 유독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아직 장점만을 대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에게서도 언젠가는 나를 실망시킬 단점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래서 사람이다. 단점보다는 장점을 귀하게 보는 마음. 그것이 필요하다. 이상하게 한국 사람들은 남을 좋게 보려는 습성보다는 상대방을 삐딱하게 보는 것 같다. 칭찬하기보다는 비판부터 하는 희한한 민족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 생각의 시차를 극복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일 것이다.
말이 많은 사람을 만났다. ‘와우, 정말 말이 많네. 피곤해’라는 생각보다는 사교성이 많고 친화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생각해야 한다. 유난히 고집이 센 사람은 주관과 소신이 있는 사람으로, 아부를 잘하는 사람은 분위기를 잘 맞추고 애교가 넘치는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나서서 설치는 사람은 적극적이어서 매력이 있고, 느린 사람에 대하여는 신중하고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다소 신경질 적인 사람을 만나면 샤프한 사람으로, 무식한 사람에 대하여 조금 터프한 사람으로 보면 어떨까?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른 시각에서 생각의 시차를 인정하며 대하면 달리 보인다. 어떤 면을 더 부각시켜 보느냐에 따라 극명하게 그 사람에 대한 느낌과 판단이 새롭게 조명된다. 지난 주간 내가 활동하는 중창단의 작은 음악회가 있었다. 우리 온가족이 자리를 함께했다. 집에 돌아와 우리 가족들은 칭찬일색이었다. 왜 그랬을까?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가족이기에 그 많은 중창 단원 중에서 나만 눈 여겨 보았을 것이고, 가족이기에 다 멋져보였던 것이다. 결국은 내가 만나는 그 사람을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의 차이이다.
신학대학 2학년 때인 20대 초반부터 교육전도사가 되어 열정을 불사르며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런 와중에 가장 많이 부딪친 대상이 교사들이었다. 나는 기도하며 계획을 세우는데 사사건건 따지며 반대의견을 내는 교사가 그렇게 미웠다. 때로는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고 사표를 던지고 싶을 정도로 교사들이 담합하여 전도사를 힘들게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연륜이 더해가며 양보의 미덕을 갖추어가기에 이른다. 그 당시에는 반대를 위한 반대처럼 보였는데 시간이 지나고나니 내 생각보다는 교사들의 중지가 더 지혜로움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여유를 가지고 양보를 하니 오히려 교사들이 한발 물러서며 전도사의 의견을 세우려는 단계까지 갔다. 한국에 나가면 함께 늙어가는 그 당시 교사들을 만나 웃으며 그 시절 이야기를 나눈다.
시각을 달리해야한다. 생각의 시차를 서로 인정해야 한다.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한국에 전화를 하려면 적당한 시간까지 기다려야 하듯 기다려주고 인정해 주는 넉넉함이 필요하다. 누군가와 생각의 시차를 느껴서 답답하고 불편한 마음이 들 때가 있는가? 그럴 때는 각 나라마다 다른 시간의 차이를 한번 떠올려 보라. 그리고 그 나라 사람과 가장 좋은 대화의 시간을 기다린다고 여기라. 그 생각의 시차를 인정하면, 더 큰 인간 이해와 배려와 용기가 생겨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