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혼자서도 잘 논다. 그러다가 친구를 알고 이성에 눈을 뜨며 더 긴밀한 관계를 알아차리게 된다. 사춘기에 다가서는 이성은 등대처럼 영롱하게 빛으로 파고든다. 청춘에 만난 남 · 녀는 로맨스와 위안, 두 가지만으로 충분하다. 눈을 감고 내 첫사랑을 회고해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 날이었던가! 처음 이성을 만나 교제를 시작하며 경험했던 풋풋한 감정은 평생 잊혀지지 않는 묘약이다. 그 감정이 편안함으로 번져가며 두 사람은 성숙한 사랑을 나눈다. 그러다가 함께 있고 싶은 열망 속에 결혼을 단행하게 된다. 사람들은 결혼생활은 가족 관계가 확장된 연애 후반의 연장으로 기대한다. 엄청난 착각이다.
부부는 성별에 따른 차이보다는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더 두드러지는 관계라고 생각하며 출발을 한다. 연애와 결혼은 확연히 다르다. 가부장적 가정에서 자라난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결혼과 동시에 아내의 내조를 사랑의 요건으로 추가한다. 사랑에 빠진 아내라면 남편을 위해 아침에 찌개를 끓이는 등 뒷바라지 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대가 변했다. 오히려 아내가 “남편이 해 주는 밥을 먹고 싶다.”고 반박한다. 이로부터 부부사이에는 보이지 않은 미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한다.
아이가 태어나고 시간이 지나며 점점 드세지는 아내에게 남편은 자조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나를 사랑하니?” 아내도 질세라 되묻는다. “나를 사랑하긴 해?”라고 쏘아붙인다. 아내는 육아와 집안일에 매어달려 사는데 훨씬 자유롭게 사는 남편을 보며 열불이 난 것이다. 연애 할 때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사랑을 말했는데, 이제는 인상을 써가며 사랑(‘당신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라는 의미)을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연인들은 많은 것을 얻기위해 결혼을 선택한다. 하지만 결혼에는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뒤따른다. 자유로운 삶, 내가 벌어 내 마음대로 쓰는 경제적 자유로움 등이 일부 사라진다. 배려가 없이는 온전한 결혼생활이 힘들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살림에 대한 요구까지 시달리는 여성의 상실감도 상당하다. 오죽하면 극장에서 영화 한 편 보는 게 소원이 됐을까? 직장에서도 “여자는 애 낳고 나면 전력이 확 떨어진다”는 편견에 시달리며 불이익을 받게 될 때가 많다. 엄마, 아내, 며느리 등 많은 역할을 수행하다 보면 이 말이 편견이 아니라 사실이 되는 슬픈 현실을 맞기도 한다. 전업주부의 상황도 녹록지 않다. 집안일은 아무리 해도 끝이 없고 표도 잘 나지 않는다. 그런 속성의 일에 자신을 묻어버린 채 배우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는 삶에는 나만의 것을 향한 갈증과 불안이 한구석에 자리할 수밖에 없다.
여성은 결혼을 통해 인생의 짝꿍과 2세라는 보물을 얻는다. 그러나 배우자 또는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일부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사랑하지 않으면 왜 같이 살겠어?”라는 대답은 둘러대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이별에 대한 두려움, 아이에 대한 책임감, 이혼을 둘러싼 사회의 부정적 시선 등은 결혼을 지속케 하는 고리일 뿐이다. 그 바탕에는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삶의 일부를 포기할 수도, 끊임없이 투닥거리는 에너지를 얻지도 못했을 것이다.
부부의 사랑은 로맨스도, 설렘도, 위안만도 아니다. 결혼에 따른 상실을 감수하면서도 함께 있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계속 같이 살잖아” 이 말이 내 사랑을 드러내는 진짜 항변이 되는 것이다. 여성으로서, 맞벌이 엄마로서의 고단한 속마음이 남편에게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부부가 상대의 희생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사랑을 이용했던 모습은 사라져야 한다. 새삼 들먹이고 싶은 사자성어는 역지사지이다. 易地思之 서로의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것이다. 잠시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보는 순간부터 부부는 함께 살고있는 개념을 넘어서서 소중한 하나임을 깨닫는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부부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보석, 그 자체이다.